▲ MBC 수목드라마 ‘로봇이 아니야’ 싼입 역의 배우 김민규. ⓒ 권우성
'처음'은 참 설레는 단어다. 처음이라 특별하고, 처음이라 소중한 모든 것들. 신예 김민규에게 <로봇이 아니야>는 그런 특별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그의 '첫' 장편 드라마였다. 하지만 김민규는 첫 조연작 <로봇이 아니야>를 마치자마자 차기작을 확정 지었다. 능청스러운 연기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던 '싼입' 김민규의 연기가, 드라마 관계자들 눈에 제대로 각인된 모양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옥에서 만난 김민규는 첫 작품을 마친 소감을 묻자 "무서웠지만, 재미있었던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주로 부산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던 그는 OCN <신의 퀴즈4>를 통해 브라운관에 데뷔했고, 이후 KBS 2TV <드라마 스페셜 – 우리가 계절이라면>에 출연했다. 처음으로 긴 호흡의 작품에 출연하며,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접하고, 자신의 지난 연기를 모니터하며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작업은 때론 무서웠고, 때론 즐거웠기 때문이다.
"산타마리아 팀 안에서 싼입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팀원들 사이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이에요. 처음엔 긴장도 했고, 제 역량이 부족하기도 해서 조금은 경직돼 있었지만, 점점 팀원들과 호흡이 쌓이면서 풀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시청자분들이 미세하게나마 싼입이 변해가는 과정이 느끼셨다면 바랄 게 없어요. (웃음)"
<로봇이 아니야> 속 싼입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경직된 관계에 놓인 인물들 사이를 부드럽게 만드는 '감초' 캐릭터다. 하지만 김민규는 싼입에게 자신만의 서사를 불어넣었다. 미국에서 동양인, 천재 공대생으로 살았다면 외골수 느낌이 강하지 않을까?', '외국 생활 오래 했으면 말하는 방법이나 액션이 조금은 과장될 것 같은데'... 작가가 부여해준 '유학파 출신의 천재 연구원'이라는 설정에 더해 자신이 싼입에게 궁금했던 점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키웠다.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나 과장된 제스처도 이렇게 나왔다.
즉흥적으로 지원한 연극영화과, 합격할 수 있었던 비결
▲ MBC 수목드라마 ‘로봇이 아니야’ 싼입 역의 배우 김민규. ⓒ 권우성
올해 나이 서른하나.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이제 막 첫 직장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아직 구직 중이라 해도 크게 늦은 것도 아닌 나이다. 하지만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신인 배우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조금은 늦은 데뷔. 여전히 '내가 배우로 계속 살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도 없다. 하지만 김민규는 "대학(경성대 연극영화과) 동기가 100명 가까이 되는데, 지금까지 연기하고 있는 남자 동기는 다섯도 안 된다"면서, "지금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하다"며 웃었다.
너무나 해맑고 기쁜 표정으로 웃는 모습에, 어릴 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워 온 '시네마 키드'였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김민규는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까지 한 번도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연기가 뭔지도 모르고 실기를 봤다"며 머쓱해 했다.
"보통 연극영화과 오는 친구들은 보통 1~2년, 적어도 6개월은 입시 준비를 하거든요. 근데 전 그 과정이 없었어요. 절실함보다는 즉흥적인 느낌으로 연극영화과를 지원한 거였거든요. 얼마나 아무것도 몰랐냐면, 연극과 독백 시험인데 독백이 뭔지도 몰라서 좋아하는 영화 대사를 준비해갔을 정도였어요. 아직도 교수님들의 표정이 다 기억나요. 진짜 빵 터지셨거든요.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으셨을 거예요. 하하하."
실기를 마치고 멍하니 대기실에 앉아있던 김민규를 깨운 건 실기 시험장 도우미였던 예대 선배들의 목소리였다. 실기 도중 교수님들을 웃게 만든 수험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선배들이 그를 보러온 것이다. 내심 '내 연기가 먹혔나?' 싶어 우쭐했고, 이후 전형 역시 기분 좋게 마칠 수 있었다. 결과도 물론 '합격'이었다.
"실기 때는 입시용 연기를 배우지 않은 저의 '날연기'를 잘 봐주셨던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전부였어요. 아무 생각 없이 지원한 연극영화과에 운 좋게 합격했지만,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친구들 사이에서, 연극 한 편 본 적 없이 연극과에 들어온 저는 그냥 짐이었어요. 공연할 때면 뭔가 도와야 하는데 오히려 피해가 될 때도 있었죠."
"계속 배우로 살 수 있을까요?"
▲ MBC 수목드라마 ‘로봇이 아니야’ 싼입 역의 배우 김민규. ⓒ 권우성
진로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던 그를 연극영화과로 이끈 건, '무슨 과 가지?'라는 고민에 갑자기 영화 <살인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운명적 끌림'이었다고 포장할 수도 있지만, 갑자기 '배우가 되겠다'는 아들의 선언을 들은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을까?
"저도 그게 신기한데, 부모님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이셨어요. 아버지가 흥이 많으시거든요. 배우가 되겠다는 제 말에 '역시 내 자식이구나' 하셨대요.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친척들 앞에서 그렇게 서태지 노래를 불렀다고. 하하하. 그래서 부모님은 어느 정도 예상하셨대요. 정작 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요."
자신도 '별생각 없이' 연극영화과를 택했던 시절, 확신 없던 아들의 꿈을 믿고 지지해준 부모님은 언제나 김민규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대학교 졸업 공연으로 부산 연극협회에서 주는 연기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아버지는 '전에도 연극으로 상 받은 적 있다'면서 초등학생 김민규가 받은 연극상을 꺼내 보여주셨다고. 김민규는 "난 기억조차 없었는데, 아버지는 집 정리하다 나온 아들의 상장을 고이 간직하고 계셨다"면서 "두 상을 나란히 놓고 볼 때 기분이 정말 묘했다"고 말했다. 늘 '난 아무 생각 없이 연기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던 김민규에게, '사실 어릴 때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었나 보다'하는 깨달음은 큰 힘이 됐다.
"제가 계속 배우로 살 수 있을까요? 아직은 그냥 바람이죠. 대중에게 알려지고 싶고, 스타가 되고 싶고... 이런 바람이 아니라, 연기를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가장 원초적인 바람이에요. 제 주변엔 훌륭한 재능을 갖고도 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는 친구들, 일용직 아르바이트하면서 버티는 친구들이 있어요. 저도 물론 아직 힘든 상태예요. 그래서 아직 제 꿈은 '다음'이 있는 배우예요. 다음이 없으면... 언젠가 연기하며 살고 있는 오늘의 제 모습을 떠올릴 때 후회가 없도록, 열심히 해봐야죠. (웃음)"
"저도 누군가의 길라잡이가 되고 싶어요"
▲ MBC 수목드라마 ‘로봇이 아니야’ 싼입 역의 배우 김민규. ⓒ 권우성
우선 지금, 김민규의 다음은 정해졌다. 차기작은 <으라차차 와이키키> 후속으로 방송되는 JTBC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로, 청소 회사를 운영하는 결벽증 남자와 더러움을 달고 사는 해맑은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극 중 김민규는 두 사람 모두와 가깝게 지내는 청소업체 직원 영식 역을 맡을 예정이다. 우선은 주어진 '다음'을 잘 마치는 게 목표지만, 그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도 있다.
"송강호 선배님, 김윤석 선배님, 조재현 선배님, 조진웅 선배님... 이분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분들이에요.
부산에서 활동할 때 서울에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분명 연기하는 건 즐거운데, 이따금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힘들 때도 있었어요. 그때 선배님들이 제 길라잡이가 되어 주셨죠. 어디서든 열심히 하면 된다, 어디서든 길은 열린다... 제가 선배님들을 보며 지난 시간을 버텼던 것처럼,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는 배우들에게 저도 희망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게 배우로서 꿈꾸는 제 최종 목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