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 오롯이 한 가수의 무대를 방송에서 1시간 동안 본 적 있는지? 질문 둘. 콘서트에 가까운 1시간 30분의 공연을 무료로 관람한 적 있는지? 두 질문에 그런 경험이 있노라고 답할 순 있겠지만 그런 적이 "많다"고 답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TV를 틀면 음악 프로그램이 넘쳐나지만 음악을 '소재'로 삼은 예능 프로그램이 대다수다. 음악이 주인공이 되는 방송 무대도 있지만 이조차 한 가수가 1~3곡을 부르고 들어가면 다음 가수가 등장한다. 음악팬 입장에선 감질 날 노릇이다. 콘서트는 또 어떤가. 한 가수의 무대를 깊이 음미할 순 있지만 티켓 값이 어지간해야 말이지, 영화표 열 장과 맞바꾸는 출혈을 감내해야 한다.
오직 음악을 위한 시공간, <스페이스 공감>의 13년
▲ EBS <스페이스 공감>을 연출하고 있는 이혜진 PD ⓒ EBS
"오직, 음악."
EBS <스페이스 공감>(아래 <공감>)이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다. 사막의 목마른 이들에게 오직 음악만을 들려주는 오아시스가 <공감>이다. 한 가수의 무대를 1시간의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고, 직접 공연장을 찾으면 앙코르까지 1시간 30분의 라이브 무대를 즐길 수 있다. 콘서트를 무료로 보는 셈이다.
게다가 관례행사처럼 공연이 끝나면 뮤지션의 사인회가 열린다. 공연은 1시간 30분인데 사인회가 2시간인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곳. 오로지 음악만으로 공감을 이루는 스페이스. 2004년 4월 3일 첫 방송 이래 13년째 장수중인 <스페이스 공감>의 이혜진 피디를 지난 20일 오후 서울 도곡동 EBS 본사 옆 카페에서 만났다. 이혜진 피디는 2011년부터 <공감>을 이끌어오고 있다. 그를 포함해 총 3명의 피디와 5명의 작가가 꾸려가는 <공감>은 탄생 이후 세 번 가량 변화를 맞았다.
"가장 처음 <공감>이 생겨났을 때 내세운 가치는 '대중문화의 고급화, 고급문화의 대중화'였어요. 이때는 음악 공연뿐 아니라 미술 작품 전시도 함께 했고요. 음악은 재즈나 클래식, 퓨전국악 같은 장르를 주로 다뤘어요. 다음은 '그곳에 가면 진짜 음악이 있다'란 캐치프레이즈로 운영됐어요. 여기서 '진짜 음악'이란 라이브 공연에 방점이 찍혀있는데 이때부터 인디 밴드들의 음악도 많이 소개했습니다.
3년 전부터는 '오직, 음악'이란 캐치프레이즈로 바뀌었어요. 음악에 집중하면서도, 음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포맷이나 장르를 다양화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이때부턴 대중성 있는 뮤지션을 라인업에 포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뮤지션 섭외의 비밀
▲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한 김창완 밴드. ⓒ EBS
▲ 김준수는 <스페이스 공감>에서 관객과 가까이 호흡하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 EBS
<공감>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 공연이 열린다. 아티스트 섭외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고 물었더니, 이 피디는 할 말이 무척 많은 듯 "정말 어렵고,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라고 답했다. 라인업 섭외는 한 달 단위로 이뤄지는데, 그 회의가 피 터지는 싸움이란다. 피디 3명, 작가 5명, 평론가 3명 총 11명이 매주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한 주 동안 나온 모든 신보를 다 들어본 후 회의한다. 그런데 11명 모두 원하는 팀이 다르다보니 선정이 쉽지 않다. 평론가들은 음악성을 1순위로 놓는다면 피디는 시청률이나 모객수도 염두에 둬야한다.
하지만 '오직, 음악'이라는 기획 의도는 모두가 같다. 출연자 섭외가 끝나면 매일 공연에 돌입하는데 조명감독, 음향감독도 외부 인력이 아닌 EBS 내부에서 모두 소화한다. 뮤지션에 따라서 악기나 세트 배치가 다르다 보니 이 또한 보통 일이 아니다.
"<공감>은 무조건 뮤지션 위주라서 선곡도 뮤지션이 원하는 곡을 그대로 하게 하고 악기 배치며 이런 것들도 그들의 의견에 맞춰요. 무대가 워낙 작고, 좌석도 적어서 뮤지션이 음악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할 땐 힘들죠. 가령 '코러스 3명 할게요' 그러면 해드리고 싶지만 3명 설 곳이 없어요. 빅밴드면 다닥다닥 붙어서 하고요."
무대도 작지만 3열~5열이 가로로 길게 늘어진 객석은 소극장 형태의 협소한 공간이다. 덕분에 자연스레 이뤄지는 아티스트와 관객의 '밀착 소통'은 <공감>만의 특장점이자 정체성이다. 신중현, 송창식, 김창완, 이은미, 주현미, 이승환, 김윤아, 제이슨 므라즈, 뱀파이어 위켄드, 클로드 볼링 등 국내외 최정상 아티스트가 이 작은 무대에 기꺼이 서고 있다. 그 비결은 <공감>만이 갖는 '오직 음악'의 힘과 관객과의 소통이 주효했다. 작년 <공감>을 찾은 시아준수는 "소극장 콘서트를 꿈꾼다고 말해왔는데 그 꿈이 이뤄졌다"며 "관객과 공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기쁘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자를 물었다. 이 피디는 "녹화하다가 운 적이 있다"며 재즈 1세대 박성연의 무대를 꼽았다. "마지막 앙코르 곡을 부를 때 클로즈업을 잡았는데 표정과 목소리에서 오랫동안 한 길을 걸어 온 사람의 분위기가 확 풍겼어요. 무언지 모를 감동이 와서 작가와 울면서 녹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공감>은 록, 팝, 재즈, 클래식, 월드뮤직, 국악 등 장르에 관계없이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인이라면 적극적으로 섭외한다.
"<공감>에 인디밴드만 나온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많은데 다양한 뮤지션들이 나오거든요. 저희는 방송도 방송이지만, 공연 영상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단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음악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섭외해서 꾸준히 아카이브를 축적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앞으로 초대하고 싶은 뮤지션을 묻는 질문엔 빅뱅의 태양이나 샤이니의 종현처럼 뮤지션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강한 아이돌을 꼽았다. 아이돌 출연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감>의 장점을 살려 아이돌의 숨겨진 '뮤지션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다. 또 뮤지컬 배우 홍광호씨를 초대하고 싶다며 조심스레 '팬심'을 드러낸 이 피디는 뮤지컬 넘버를 무대에 올려 <공감>의 울타리를 확대해보고 싶다고 했다.
국카스텐 & 장기하와 얼굴들, '헬로 루키'가 발굴한 가수들
▲ 2009년 '헬로 루키' 축하무대를 꾸민 국카스텐. ⓒ EBS
<공감>은 신인 발굴 프로젝트 '헬로 루키'를 10년째 이어오고 있다. 처음 시작한 2007년에만 해도 유튜브를 보고 재능 있는 뮤지션을 발굴해 신인이어도 방송 기회를 주는 작은 이벤트였다. 하지만 들어오는 협찬을 받기 시작하고 점점 커지면서 오디션 형태로 다음해에 발전하게 됐다. 2008년에 무명의 밴드 국카스텐과 장기하와 얼굴들이 각각 대상과 인기상에 선정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됐다. <공감>팀이 한국 가요계에 '큰 일'을 한 셈이다. 당시 가난한 밴드였던 국카스텐은 가내수공업으로 앨범을 만들 때였는데, '헬로 루키'에서 받은 상금 덕에 음반을 내고 음악 활동을 계속 해나갈 수 있게 됐다며 감격의 소감을 밝혔다.
'헬로 루키'를 둘러싸고 제작진 내부에선 고민이 많다. 보통은 이런 특집물의 경우 작가와 피디진을 따로 구성하기 마련인데 '헬로 루키'는 <공감> 피디와 작가들이 직접 도맡고 있다. 예산과 공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인 것. 하지만 매달 2팀을 선정해서 후에 1년치 결선 무대를 갖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내부 인력만큼 적합한 사람들은 없다. 선정된 뮤지션을 1년 동안 꾸준히 지켜봐야지 결선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 또한 뽑힌 루키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헬로 루키' 이후에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타 방송에서 많이 생겨 이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다.
그렇다고 '헬로 루키'가 없어질까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만약 없어진다 해도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제작진처럼 보였다. 지난 2014년, 매일 공연을 주 2일로 축소할 위기에 놓인 적이 있는데 이때 피디들이 반대하고 나섰던 사례가 그 근거다. 이들이 축소를 반대한 건 뮤지션에게 부여되는 무대 기회가 줄어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뮤지션들도 한 목소리로 반대하고 나섰다. '공감을 지켜주세요'란 타이틀로 음악인들이 홍대 일대에서 자발적 무료 공연을 펼친 것. "<스페이스 공감>은 대한민국 음악이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라며 서명운동도 벌어졌다. 이 피디는 "뮤지션들이 이 프로그램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단 걸 확인하고 당시 큰 힘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세월호 희생자 위로한 특별기획 <노래가 필요할 때>
▲ EBS <스페이스 공감> 축소 반대를 위한 공연 포스터 ⓒ EBS
앞으로 <공감>에서 새롭게 해보고 싶은 걸 묻자 이 피디는 망설임 없이 "공들인 기획공연을 더 많이 하고 싶다"고 답했다. "<공감>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2015년에 세월호 1주기 특집으로 <노래가 필요할 때>를 기획하여 '이달의 피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특집을 위해 공감홀을 벗어나 바다, 학교, 집 등을 옮겨 다니면서 공연했다. 관객은 없었다. 죽은 자들이 관객이었다. 이 기획의 계기는 이랬다. <공감>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해온 변고은 작가에게 이 피디가 "<공감>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 프로그램을 우리가 처음부터 만든다고 생각했을 때 무엇을 가장 해보고 싶냐"고 물었던 것. 그때 변 작가가 이 기획을 제안했다.
이 피디와 변 작가가 주축이 된 이 기획의 아이디어는 밴드 '이디오테잎'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세월호 사건 후 한동안 결방되다가 방송을 재개했을 때, 신나는 공연을 할 때면 제작진 모두 '이게 맞나' 싶은 마음이 컸다. 마침 이디오테잎이 공연 마지막에 세월호 추모 노래를 했고, 그 무대를 보며 '어떤 때는 말보다 음악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작진이 깊이 느꼈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말 없이, 관객 없이 오직 노래 하나로 공연을 이어가는 <노래가 필요할 때> 기획을 마련하게 된 것. "노래가 가진 위로의 기능을 직접 경험한 제작진들이 엄청난 열의를 갖고 제작했다"며 이 피디는 당시를 상기했다.
음악신에 화두 던지고 이끄는 <공감>될 것
▲ 윤도현 밴드 EBS <스페이스 공감> 무대에 선 윤도현 밴드. ⓒ EBS
<공감>의 장수 비결은 다양했다. 이 피디는 "오직 음악 자체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존중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비결이 아닐까" 하고 답했다. 인터뷰 첫 질문으로 <공감>의 기획의도를 물었을 때 "좋은 음악을 대신 찾아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전달하는 것"이라고 답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제가 <공감>에 자부심을 갖는 것 중 하나는 '음악을 사랑하는 스태프들이 모여서 만드는 프로그램'이라는 겁니다. 매일 공연, 매주 2회 방송이라는 빡빡한 스케줄을 진행하다 보면 지치기 마련인데, 작가, 조연출, 무대 스태프들 모두 음악과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더 많은 음악을 소개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어요."
EBS는 2017년 중순쯤 일산 신사옥으로 이사한다. "회사 이전이 <공감>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고 말하는 그에게 "기대되시죠?" 하고 물었다. 대뜸 "걱정돼요"란 짧은 답이 돌아왔다. 오랫동안 해온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틀 밖의 큰 변화를 시도하기 힘든 점이 있지만, 환경이 바뀌면 못 했던 것을 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며 기대감도 내비쳤다. 새로운 도약을 앞두고 설렘 반, 걱정 반 상태였다.
이 피디는 올해 초 특별기획 <재즈의 비밀>편을 방송해 지난 3월 '제28회 한국PD대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렉처 콘서트 형식으로, 재즈를 모르는 사람을 초대해 재즈를 함께 알아가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렇듯 새로운 기획을 만드는 걸 좋아하는 그에게 <공감>의 미래를 물었다.
"<공감>이 지금까지 장수했던 또 다른 비결은 음악신에 던지는 화두 같은 게 있어서였어요. 예를 들면 인디밴드에 관심을 둬야겠다 생각해서 인디밴드를 섭외했고, 신인 뮤지션을 지원하면 어떨까 해서 '헬로 루키'를 시작한 것 처럼요. 이제 새로운 어젠다를 설정할 시기가 온 것 같아요. 새 화두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공감>이 나아갈 미래을 좌우하는 열쇠 같아요."
▲ 이혜진 PD는 2009년 EBS에 입사했다. ⓒ E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