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설> 스틸컷
판씨네마(주)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 <폭설>은 윤수익 감독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돼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처음 시작할 때 사랑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고 말한다.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 <일상의 광기에 대하여>에 실린 단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후의 일이다. 자신의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고정된 시선과 기대하는 모습, 스스로의 어긋난 내면의 간극 때문에 자멸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이 부분을 현시대와 대중이 연예인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는 편견으로 이어보고자 했다.
시작은 동명의 단편 영화였다. 먼저 캐스팅이 확정돼 있었던 수안 역의 한해인 배우와 함께였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배경 설정은 유사했지만 극이 나아가는 방향은 달랐다. 자신의 꿈속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하는 인물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어떤 해석을 하기 위해 지금 이런 말들을 꺼내고 있는지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한소희 배우가 설이를 연기하고, 한혜인 배우가 수안이라는 인물로 녹아들며 완성된 장편 영화 <폭설>은 분명히 그런 영화다. 갑자기 쏟아지는 많은 눈 속에서 서로를 마주했던 두 인물이 이제 찾을 수 없는 누군가의 흔적을 그리고 있는, 꿈속을 헤매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
영화는 세 개의 작은 막(Act)으로 구성돼 있다. '설'과 '수안', 그리고 '바다'다. 이 중 극중 인물의 이름으로 명명된 '설'과 '수안'의 챕터는 서로 마주 본 상태로 놓인다. 각각의 구성이 기승전결과 같은 서사의 흐름을 위해 계획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서사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설'에 해당하는 이야기만으로도 영화는 완성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놓인 과제는 뒤따르는 '수안'과 '바다'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설'이다. 여기 첫 번째 막의 화두를 어떻게 이끌어내느냐에 따라 영화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된다.
02.
수안(한해인 분)과 설(한소희 분)은 학교의 연극 수업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전학생에게 유난히 텃세가 심한 학교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수안이 설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는 이미 드라마의 주연을 맡았을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수안은 아직 학교에서 학생들이 연출하는 작품조차 한 번 출연한 적이 없다. 영화는 두 인물을 동등한 입장의 학생인 것처럼 바라보고자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수안은 유명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으면서도 예쁘지 않은 얼굴 탓에 진짜 배우가 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대신 감독이 돼 자신이 그리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찍어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대중 앞에 설 수 없다면 그 뒤에서라도 카메라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반대로 설은 열 살 때부터 해온 방송일 탓에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에만 매달렸다. 자신이 가진 예쁜 얼굴로 어른들이 원하는 값어치만 하면 되는 삶이었다. 그 결과 주어진 배역만 생각하느라 정작 자신이 누군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인물은 자신이 머무는 세상으로부터 영향받는다.
인물 사이에 발생하는 입장의 거리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다. 서로의 입장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설'에서는 갈등을 발생시키고 두 가지 거짓말을 낳게 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인물과 그런 인물이 가진 반짝이는 세상을 동경하는 인물로 결정지어진다. 서로의 세계를 동경하는 두 인물이 외부의 배척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일. 심지어 그 감정이 우정보다 더 깊은 내밀한 것이라면 어떤 모양이 될까. 영화는 닿을 듯 닿지 않는 점 하나를 향해 두 인물을 내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