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롤로지> 공연사진
연극열전
우리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독특한 전개 방식 탓에 어색하게 느낄 관객도 있겠지만, 연극이 가진 문제 의식은 명확해 보인다. 연극 <킬롤로지>는 한 마디로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특별히 나쁜 누군가의 폭력, 악인의 살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있는 폭력성을 꼬집는다. 누구나 특정 조건만 갖춰지면 언제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세 사람의 회고를 통해 증명한다.
연극을 토대로 폭력성의 조건을 정리해보자면,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약한 상대, 즉 자신이 비교적 우세한 위치에 있을 때다. 게임과 같은 방식으로 폭력을 당한 데이비는 피해자의 지위에만 있지 않다. 그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다.
학생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만만한 선생님을 의자로 내리치고, 평소 악행을 저지르던 에디라는 인물이 자신보다 작은 체구라는 사실을 직면하자 폭력을 휘두른다. 이대로 자신의 강아지를 내려놓는다면 강아지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놓는다.
가해자이기도 했던 데이비는 자신이 피해자일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게 뭐가 공평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자동차를 보고 던진 질문이다. 여기서 폭력의 조건과 특징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바로 '불공평함'이다. <킬롤로지>는 폭력에 권력 관계가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 조건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의 제거다. 아들의 희생을 목도한 알란은 게임을 만든 폴을 찾아간다. 게임과 같은 방식으로 아들이 당했으니, 게임을 만든 폴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폴은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며 자신의 책임을 부인한다. 이에 알란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편다.
장전만 할 뿐 총알을 발사하지 않았던 군인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인간에게는 본디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 거부감은 제거될 수 있는 것이라고, 군대는 실전과 같은 훈련을 통해 군인이 살인에 둔감해지도록 한다고 설명한다. 외부 요인에 의해 폭력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은, 게임을 만들어 유저들의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제거해 실제 살인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논리를 구성한다.
이는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설명을 떠오르게 한다. 메를로퐁티는 '몸이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명제를 내세웠다. 사유 기능을 수행하는 두뇌는 제한적이고, 우리 몸에 체화된 무언가가 사람을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의도하지 않은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쯤에서 오늘날 미디어를 생각해본다. 미디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그 가운데 폭력적인 이미지의 양은 결코 적지 않다. 미디어라는 외부 요인이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제거하고 있진 않은지, 그렇게 누구에게나 잠재해있는 폭력성이 꿈틀거리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나아가 <킬롤로지>는 미디어뿐 아니라 폭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외부 요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