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리에게>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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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지 4년이 지나도록 서로 으르렁거리던 어느 날, 드라마는 뒤늦게 현오의 속사정을 드러냈다. 엄마는 멀리 떠나며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남은 아버지는 날마다 빛 독촉에 시달리면서도 도박으로 날을 보냈다. 도박하는 아버지 뒤에서 책을 보며 공부하는 현오를 아버지의 친구들은 희한하게 봤다. 그런 아버지마저 사라지고, 홀로 남은 현오 앞에 양미자가 나타났다. 명목이야 아버지의 남은 빚을 갚으라는 것이었지만 현오를 눈여겨 본 양미자는 그에게 제안을 했다. 그를 키워줄 테니 대신 나이가 들어가는 양미자의 다섯 자매를 보살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현오의 어깨 위에는 다섯 할매가 얹혔다. 현오는 생각했다. 이건 자기만의 몫이라고. 그 누군가 결혼이라는 인연으로 얽매여 자신의 무게를 나눠지게 할 수 없다고. 그랬기에 현오는 은호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단칼에 이별을 선언했다. 아마도 당시 현오는 그게 나름 은호를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영화 <헤어질 결심> 속 해준(박해일)도 그랬다. 형사라는 자신의 존재에, 결혼을 했다는 자신의 처지에, 서래(탕웨이)와의 사랑은 안될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녀와는 살인사건으로 만났다. 남편을 살해했을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해준도 생각했다.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게 두 사람에게 나은 것이라고.
<헤어질 결심>의 해준도, <나의 해리에게>의 현오도 모두 헤어지는 게 서로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사랑이 뭔지 몰랐던 게 아니었을까.
사랑은 서로의 경계가 무너져 새로운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독립적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지만 사랑 앞에서 그 말은 속수무책이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사랑이라는 세계가 무너졌을 때, 무너뜨린 당사자야 자신의 결심대로 밀어붙이며 앞으로 나아갈 테지만, 무너짐을 당한 당사자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는 헤아리지 않는다. 자신의 결심을 지키는 게 때로는 더 중요할 테니.
현오는 자신을 찾아온 강주연(강훈)을 통해 비로소 은호에게 생긴 일을 알게 된다. 은호에게 해리성 성격장애가 생겼음을, 발병 시기가 동생인 혜리가 사라진 시점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헤어진 4년 전이었음을. 혜리로 살던 은호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현오는 비로소 깨달으며 오열한다. 자신의 이별이 은호의 세상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자신의 결심에 충실하려 했던 <헤어질 결심>의 해준은 끝내 서래를 놓치고 만다. 무너진 세상 속에서 동아줄이라고 믿었던 임호신(박용우)을 잡았지만 그마저 썩은 동아줄이었다. 살기 위해 또다시 두 번째 남편마저 세상에서 지운 서래는 이제 해리처럼 자신마저 지우려 바다로 떠난다.
뒤늦게 서래를 찾아온 해준이 마주한 건 밀물 속에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황량한 바다였을 뿐이다. 목놓아 '서래씨'라고 불러도 답은 없었다. 그의 '결심'이 어떻게 한 여인의 삶을 무너뜨렸는가 처절히 목도할 뿐이다.
적나라하게 그려낸 사랑의 본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