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노라>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철없는 부자와 속물적 여자의 막장스런 연애
그로부터 영화는 애니와 이 러시아 사내 반야(마크 아이델슈테인 분)의 흔해 빠진 이야기로 향한다. 사내의 정체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러시아 권력자의 귀한 아들이다. 돈 많고 힘도 센 아버지는 아들에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 모양, 멀리 미국까지 공부하라 보내놓고는 이렇다 할 관심을 주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왔다. 돈도 많고 시간도 많은데 부모는 멀리 있는 갓 스물 아이가 무엇을 할까. 게임을 하고 된 통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사고를 치고 온갖 하지 말라 할 법한 일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그를 가까이서 지켜봐 온 사내와 부하들이 있지만 폭주하는 아이를 막지는 못한다. 좌충우돌 날뛰던 그가 스트립바에서 애니를 만나고 그녀와 바깥에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침내는 결혼까지 하게 된다. 결혼이라니. 그것도 어디서 굴러먹다 온 줄 모를 스트립바 댄서와.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로 러시아 국가와 민족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진 그의 부모가 결코 허락지 않을 일이다. 철없는 아이를 이혼케 하려는 부모와 그가 보낸 사람들, 또 말도 잘 안 통하는 반야와의 결혼을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애니의 이야기가 이 영화 <아노라>를 이룬다.
도파민이 뿜뿜 뿜어지는 영화다. 재벌집 막내도 아니고 유일한 후계자와 스트립댄서의 결혼이라니. 영화는 그 시작도 별것 아니라는 듯 혈기 왕성한 두 남녀가 붙을 때마다 서로 섹스하고, 다시 먹고 마시고, 또 섹스하는 장면을 자극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고귀한 정서적이며 정신적인 것은 못된데도 이들의 사랑을 누구도 의심치 않을 때가 되어서야 이들의 결합을 가로막는 역경을 던져놓는다. 그 과정 또한 자극적인 소동극 못잖아서 영화를 보는 이들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스크린에 두 눈을, 이야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요컨대 <아노라>는 이 시대 가장 자극적 설정으로 무장한 작품이다. 션 베이커와 같은 걸출한 창작자가 아침드라마적 설정으로 한 편의 영화를 찍는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하는 궁금증을 이로부터 해소할 수도 있겠다. 이 시대 연애와 결혼의 속물적 구조를 낱낱이 뜯어 비추는 한편으로 계급화된 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일깨운다는 흔한 비평도 어찌저찌 들어맞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