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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이 살아움직인다고? 이 남자가 겪은 곤욕

[김성호의 씨네만세 857] 29회 부산국제영화제 <미스터 K>

24.10.20 14:02최종업데이트24.10.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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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0년 전 떠올린 이야기라고 한다. 얼마나 만들고자 하는 염원이 강했으면 무려 20년이 지나 마침내 그 착상을 실사영화로 제작했다. 그저 스쳐지나갈 특이한 생각이 아닌, 지구 반대편 관객과 대면하는 장편 영화로 작품을 만들어냈다. 착상이 작가를 설득했단 뜻이겠다.

이따금 창작자를 매료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이건 반드시 만들어야지 결심하게 하는 작품 말이다. 몇몇 결점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해내야 한다며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트는 이야기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올해 자기 초기작을 새로 가다듬어 장편으로 완성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출간한 것처럼, 영화판에도 그와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가 '플래시 포워드' 섹션으로 초청한 <미스터 K>가 꼭 그와 같은 작품이다. 아시아가 아닌 지역 출신 감독의 첫, 또는 두 번째 장편을 대상으로 한 이 섹션은 관객 투표로 플래시 포워드 상을 주는 부문이다. <미스터 K>는 노르웨이 출신 연출자 탈룰라 H. 슈왑의 두 번째 장편으로 알려져 있다. 첫 장편 <컨페티 하베스트>가 베를린영화제에서 주목받은 가운데 토론토영화제에 이어 부산이 그녀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작품을 가져온 것이다.

미스터 K 스틸컷
미스터 K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외딴 호텔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일들

영화는 어째서 슈왑이 이 작품을 오래도록 품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요소로 가득하다. 고독한 어느 마술사 미스터 K가 어느 외딴 호텔을 찾아 하룻밤을 묵으려던 가운데, 이 공간이 마치 생명을 갖고 있는 미지의 존재처럼 그를 가둔다는 게 주요 얼개다. 말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공간에 고립된 인간이 탈출하려 발버둥치는 미스터리 판타지 영화로, 다른 영화에선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독창적 착상으로 가득 찬 독특한 작품이 되겠다.

미스터 K가 호텔에 체크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부터 예기치 않은 사건이 거듭된다. 우선 호텔방 바닥에 웬 키 큰 사내가 엎어져 있다. 깜짝 놀라 그를 쫓아 보낸 K는 혹시나 방의 다른 곳을 뒤지기 시작한다. 또 다른 이가 제 방에 숨어들어 있을까 염려해서다. 역시나, 장롱 문을 여니 웬 여자가 숨어 있다 황급히 뛰쳐나간다. K가 기겁한 건 물론이다.

이상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방을 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갑자기 벽에 이상한 구멍이 하나 나고 그곳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악단을 연상시키는 이들은 통일된 복장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K를 향해 걸어온다. K가 황급히 자리를 피한 끝에 겨우 그들을 따돌리지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를 이해할 수는 없다.

마술도구가 잔뜩 든 가방 또한 사라진다. 가방을 어느 아이가 들고는 내뺀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들어간 방문을 열어젖히니 그곳은 좁은 창고에 불과하다. 한 눈에 보아도 아이가 숨어있을 공간이 없는 것이다. 같은 곳으로 아이 말고도 다른 이들이 들어가지만 열어보아도 여전히 비좁은 공간일 뿐이다.

미스터 K 스틸컷
미스터 K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호텔이 살아 움직인다고?

영화는 이처럼 K가 미스터리한 일을 연달아 겪는 모습을 비춘다. 도무지 불가해한 경험들이 거듭되는 가운데 K는 제가 호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단 걸 깨닫는다. 발버둥치면 칠수록 제가 호텔 안에 갇혔다는 사실만 알게 되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건 컨시어지를 비롯해 호텔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K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해주지 않는단 사실이다. K가 아무리 소통을 위해 노력해도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영화는 더욱 요상한 색깔을 드러낸다. 마치 건물이 생명을 가진 듯 꿈틀거리며 하루가 다르게 무질서해지는 것이다. 건물 복도가 조금씩 좁아지는 건 물론이고, 건물 벽이 상해 벽지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고 관이 뒤틀리기도 한다. 벽 안에 끔찍해 보이는 생명체가 붙어있는 모습도 관찰되는데, K는 그 존재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딱딱한 물건을 들어 그를 찍어보았다가 온 건물이 뒤틀리는 듯한 비명을 듣기까지 한다. 이쯤되면 이 건물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K를 위협하는 건 건물만이 아니다. 건물에선 K가 선지자라는 일종의 소문이 퍼져나간다. K가 모두를 구원할 구세주라는 이야기다. 그렇다 해서 사람들이 K를 돕는 것도 아니다. 마치 미신을 맹종하는 무지한 이들처럼 K를 어루만지려 들 뿐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는 K가 뚜렷한 활약을 하지 못하자 그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K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해 먹을 것을 먹고 물건들을 도둑질하기도 한다. K는 점차 건물 안에서 고립된다. 비현실적인 공간, 비상식적인 사람들, 기댈 곳이 없는 K의 상황이 영화에 극적 긴장을 불어넣는다.

미스터 K 스틸컷
미스터 K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컬트 고전 떠올리게 하는 독창적 분위기

소위 컬트영화, 일부 마니아층에게 강렬한 지지를 받는 독창적 영화의 색채를 <미스터 K>는 얼마쯤 띄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장-피에르 주네의 <델리카트슨 사람들>이나 조엘 코엔의 <바톤 핑크> 같은 작품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스터리와 코미디가 컬트적으로 조합된 <미스터 K>로부터 21세기 들어 명맥이 흐려지고 있는 컬트적 분위기를 선명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건 영화가 초반의 흥미로운 발상에 비해 그를 심화하는 과정의 설득력을 얼마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겠다. 호텔 전체가 마치 살아있는 듯 사람을 잡아둔 채 변화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외부로의 탈출을 기대치 않고 안주하는 이유를 영화는 K에겐 물론이고 관객에게까지 전혀 납득시키지 못한다.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기괴한 사건만 거듭 쌓아올리니 어느 시점이 지나 관객은 수긍하기보단 지치고 포기할 밖에 없는 일이다.

창의적 설정과 이를 시각화한 기술적 성과, 무엇보다 미스터 K 역할을 맡은 배우 크리스핀 글로버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호평이 얼마 따르지 않은 건 최소한의 개연성조차 챙기지 못한 영화의 무책임함 때문이다. 탈룰라 H. 슈왑은 한국에서 유행한 우스갯소리 그대로 20년에 걸친 사연을 풀어놓으며 '탈룰라'하려 들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물리적 개연성이 아닌, 관객을 납득하게 할 정도만의 개연성조차도 마련하지 않은 시도는 마침내 모든 빗장이 풀리는 결말부에 이르러 영화를 무책임한 판타지 쯤으로 여기게 할 뿐이다.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부산국제영화제포스터부산국제영화제

병든 지구 위 인류를 떠올리며

그럼에도 영화가 완전히 무의미한 작품이라 폄훼할 수는 없다. 몇 가지 상징적 장면과 설정은 개연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전무한 상황 가운데서도 특별한 의미로 연결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등장하는 개미가 대표적이다. 개미는 벌과 함께 인류가 장악한 듯 보이는 이 행성에서 또 다른 문명을 일군 성공적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 존재를 인상 깊게 잡아내는 장면은 이 영화가 그저 미스터 K라는 개인에게 벌어진 미스터리한 경험에서 그치지 않고 문명, 나아가 인간이란 종 자체의 우화일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를 통해 내다보자면 살아 있는 듯 보이는 호텔이 갈수록 살기 팍팍하고 좁아지며 유지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공간으로 비춰지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인류가 사는 지구가 꼭 그와 같아서 기상이변과 자원고갈로 어려움에 처한 인류의 메타포로써 영화를 이해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한편으로 탈출을 이야기하는 미스터 K의 이야기에도 눈앞의 작은 욕구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진짜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알지 못한 채로 돈벌이며 성공 따위에 모든 정력을 쏟아 붓는 우리네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미스터 K를 선지자로 추켜세우면서도 길을 알지 못해 그가 헤맬 때마다 맹렬히 비난하는 이들의 모습 또한 대중의 우매함과 조급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이 마침내 미스터 K의 작업을 방해하고 결정적으로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일을 벌이는 광경 또한 마찬가지다. 이를 종합하자면 <미스터 K>는 그 자체로 인류의 묵시록을 우화적으로 풀어낸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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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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