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모든> 공연사진
국립극단
통제받고 소외되는 디스토피아
연극 <모든>을 보고 있자면 많은 작품과 이론가들이 스쳐 지나간다. 15살이 된 '랑'이라는 인물은 '생산 가능 인구'로 판정받는데, 여기서 생산 가능 인구는 보통 쓰이는 경제학적 개념과는 다른 뜻이다. 흔히 생산 가능 인구라고 하면, 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는 15~64세 연령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 속 세계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유전자를 가져 후대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여기서는 아이를 낳는 데에도 공장과 기술의 힘을 빌리고, 인공지능의 통제를 받는다. 공장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아이를 찍어내는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여느 디스토피아 소설 속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관리되는 것을 편하게 느끼고, 이외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권력을 쥔 사람 또는 집단이 생각하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모든>에서는 인공지능이 바로 그 권력을 쥔 주체다.
관람 중 '책 듣기'라는 표현을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끼칠 만큼 섬뜩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사회를 너무나 감각적으로 표현한 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행위와 듣는 행위를 비교해보시라. 책을 읽는 행위는 자신이 원하는 책을 골라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읽어나가는, 능동적인 행위다. 반면 책을 듣는 행위는 수동적인 행위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제를 갈구한다. 누군가 자신을 통제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통제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가 없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결국 인공지능의 통제에 종속되어 버린다.
독일의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는 당시 종교에 대해 논의하며 '소외'를 개념화했다. 그에 따르면 소외란 자신이 만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이후에는 대립하게 되며, 결국 만든 것에 지배받고 종속되는 것이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위치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연극 <모든>의 세계는 이런 소외로 점철된 세계라 할 수 있겠다.
최근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가 진척되면서 윤리적인 고민의 필요성이 늘 대두됐다. 하지만 편리함의 덫에 빠져 위험성을 외면하는 경우도 많다. 연극 <모든>은 이를 경고하며 동시에 실천적 태도를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