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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엄마 돌봄 자처한 딸, 미처 밝히지 못한 속내

[넘버링 무비 400]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홍이>

24.10.15 14:20최종업데이트24.10.1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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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홍이> 스틸컷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홍이>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다른 누군가의 생을 떠맡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이 플러스와 마이너스 사이의 균형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이 일만큼은 그럴 수가 없어서다. 타인의 삶을 자신의 인생 안으로 데려와 품는 일에는 그보다 더 큰 총량의 감내와 희생이 필요하다. 부모나 자식, 가족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문제는 관계와 사랑이 얼마나 두터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삶에서 얼마나 많이 내려놓을 수 있는가, 어디까지 물러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 <홍이> 속 모녀가 마주한 문제가 꼭 그렇다. 이제 막 치매 초기에 접어든 엄마 서희(변중희 분)와 아직 자신의 자리를 오롯이 세우지 못하고 겨우 매달려 살아가는 홍이(장선 분)의 이야기. 두 사람의 관계를 그나마 안정적으로 유지하던 시간은 딸이 엄마를 요양원으로부터 자신의 단칸방으로 모시고 오면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홀로 둘 수 없는 엄마를 돌봐야 하는 상황과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제 삶을 짊어져야 하는 상황. 이 고약한 생을 놓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위태로운 거짓말과 늘어만 가는 빚뿐이다. 현실은 꿈을 좀먹으며 성장하고, 꿈을 빼앗긴 자신은 이제 어느 쪽의 선택도 할 수가 없게 되고 만다.

02.

엄마가 집으로 오기 전 홍이의 삶은 겨우 유지되는 수준이었다. 대부업체를 통해 빌린 빚은 갚지 못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이고, 지금은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도 빌린 돈이 남아 있다. 선생님이 되고 싶어 시험 준비를 했지만 지금은 가까운 학원에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친다. 그렇게 생활비를 벌지만 넉넉지 않아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삶 위에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더해지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힘겹다. 기본적으로는 경제적인 부담이 늘어날 것이고, 대상을 돌보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기존의 삶에서 무언가를 덜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홍이가 엄마를 직접 모셔야겠다고 생각한 배경에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있다. 엄마의 노란 주머니에 고이 간직된 것. 그 통장 속에 들어있는 전 재산이다.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상황과 점차 목을 조여오는 채무 독촉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엄마 서희의 목돈이 필요했다. 대가로 지나치게 많은 잔소리와 고약한 성격을 받아내야 하지만 그것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그보다 더한 일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 자신 앞에 놓일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홍이> 스틸컷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홍이>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3.
황슬기 감독이 영화를 구조화하기 위해 모녀를 활용하고 있는 방식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두 인물을 직접 부딪치게 만들어 사건과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이 놓인 상황을 마찰하도록 엮는다. 인물이 직접 부딪힐 때 감정은 즉발적이고 단면적으로 드러나지만, 상황에 의해 엮이게 될 때는 그보다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뭉근하고 꾸준하게 점진적으로 쌓인다. 이렇게 마련된 감정은 특정한 때에 어느 때보다 거세게 일며, 원인이 되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놓인 온갖 묵은 부정적인 감정까지 이끌어낸다. 여기에 서로에 대한 이해나 화해가 놓일 자리는 마련될 수 없다.

두 모녀의 관계에서만 표현되는 부분이 아니다. 엄마를 온전히 돌볼 수 없는 홍이를 대신해 낮 동안 도움을 주고 있는 해주 이모 역시 홍이에게 그런 비슷한 감정을 쌓아간다. 선의로 시작한 호의를 마치 자신의 권리인 양 행동하는, 자신의 상황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듯한 홍이의 모습으로 인해서다. 두 사람의 관계 사이에서도 인물 사이의 충돌 이전에 각자의 상황이 먼저 맞부딪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상황적 충돌의 중심에는 치매가 시작된 엄마 서희가 있다. 그녀가 홍이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뜻이다.

04.
중요한 사실은 일방적으로 홍이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30대 여성의 삶에도 구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있다. 화목한 가정, 안정적인 경제력, 그리고 편안한 이성. 누구나 바라는 너무나 당연한 바람이다. 그녀도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구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최소한의 방법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바짝 엎드린 상태에서. 이마저 비난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여러 문제를 더욱 키우는 일에는 홍이라는 인물이 가진 명확하지 못한 성격이 한몫한다. 엄마와의 관계는 물론, 이모 앞에서도, 심지어 오픈 채팅으로 만난 남성에게도 그는 솔직해지는 대신 자신의 일부를 감추는 선택을 한다. 이런 종류의 거짓이 잠깐의 시간을 벌어다 주는 대신 언젠가 이 관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폭약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마다 그런 모습이 되고 마는 것은 역시 그의 성격 자체에 정확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다. 이에 대해서 영화가 별개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그의 그런 성격은 엄마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또 한 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홍이> 스틸컷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홍이> 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05.
황슬기 감독은 자신의 지난 작품 전반에 걸쳐 중년 여성에 대한 시선을 지속적으로 놓지 않았던 바 있다. (꾸준히 아이들을 바라봤던 윤가은 감독의 작품 대부분에 참여했던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자유로>(2017)에서는 삶을 얽매고 있던 존재들에게 벗어나 진짜 자유를 찾은 듯한 두 여성 여진(김정영 분)과 주희(이지하 분)를 담아냈다. <좋은날>(2021)에서는 부모라는 이름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나, 일련의 과정을 거쳐 실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오는 두 엄마 정아(이주영 분)와 미금(김금순 분)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번 작품 <홍이>에서 극의 전면에 중년 여성이 아닌 30대 여성의 애환이 놓이고, 그 이면에 중년 여성의 돌봄 문제에 대한 서사를 두고자 했던 것은 다름이 아닌 감독 자신이 경험했던 일과 연관이 있다. 잠시 동안 하게 되었던 어머니의 병간호다. 이를 통해 누군가를 돌본다는 일이 여성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 그녀는 홍이라는 인물의 삶에 돌봄 문제를 비롯한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이식하게 되었다. 실제로 영화에는 청년 실업 문제, 대출 문제와 같은 현시대의 젊은 세대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가 홍이의 삶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의 마지막에 놓인 장면 하나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정말 그렇다. 무엇도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홍이의 삶은 엄마와의 마지막 장면 앞에서도 역시 그렇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영화는 그 결정을 엄마에게로 떠넘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치매가 시작된 엄마 서희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이 장면은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엄마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정확한 대답처럼 느껴진다. 훗날, 이 영화를 관람할 이들을 위해 이 장면만큼은 이 정도로 아껴두고자 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홍이 장선 변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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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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