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파동>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는 상상력과 환상 속에서 태어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영화는 창작자의 현실로부터 깨어나기도 한다. 직접 경험했던 일이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스크린 속으로 옮겨다 놓는 일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시절에 강하게 뿌리내린 감정이나 정서가 삶의 궤적을 따라 축적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지가 되고 형상화하는 것. 그런 순간이 되면 이제 더 이상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 살아갈 수는 없게 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영화의 태동 가운데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영화 <파동>이 꼭 그렇다. 오랜 시간 배우로 활동을 이어왔던 이한주 감독이 카메라가 아닌 모니터 뒤에서. 자신의 발성이 아닌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이제 해야만 했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이 작품에는 두 인물이 맴돌고 있다. 서울에서 철도 기관사로 일하는 문영(박가영 분)과 초등학교 교사인 상우(안병우 분)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같은 공간을 향해 짧은 여정을 떠난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찾기 위해 필요한 행위다.
영화는 그런 두 사람의 닮았지만 결코 같을 수는 없는 시간을 따르며 이야기를 쌓아나간다. 동시에 감독은 이들을 연결하고 분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과거와 현실, 기억과 환상의 끊임없는 교환은 관객들을 신과 신 사이의 짧은 공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극의 서사가 가진 아픔과 고통이 고이는 자리다.
02.
"살아간다는 건 서커스와 같아서 똑바로 서 있다가도 절실하게 물구나무를 서기도 한다."
이 작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장면은 지하철 운행을 위해 플랫폼에서 기다리던 기관사 문영이 알약 하나를 삼키는 신이다. 신경안정제로 보이는 작은 알약 하나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이내 셔츠의 깃을 매만진다. 보통의 경우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모습이지만, 내게는 이 모습이 영화 속 문영의 전부와도 같이 느껴졌다. 기관사로서 목격하게 되는 어떤 사고사와 그로 인한 심리적 트라우마. 그 무게를 감당하기도 힘들 것만 같은 인물이 몸의 매무새를 연이어 챙긴다는 것 자체가 해당 인물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다.
그 모습은 마치 이미지의 괴리성을 활용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멀쩡한 사람이 어두운 자리를 향해 스스로 걸어가는 뒷모습이나 말끔하게 차려입은 이로부터 전해지는 절망과 슬픔의 감정은 그 상태만으로도 극의 정서를 전달하는 힘이 있다. 다시 돌아와서, 그의 말에 따르면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상태'에 놓인 인물의 태도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던 셈이다. 정제된, 자신의 공간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상태. 아니, 언제든 조용히 그 자리를 이탈할 수 있는 준비.
문영의 이 장면에 대해 반드시 이야기했어야 하는 건 이 영화의 독특한 편집과 구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감독은 이 작품을 기억과 환상이라는 감각적 장소와 그 경계에서 구현해 내기 위해 여러 지점을 각기 다른 위치에서 오버랩하기도, 겹쳐두기도, 심지어는 하나의 장면조차 여러 자리에서 이어 붙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적어도 내게 이 영화의 시작이자 문영이라는 인물이 가진 내러티브의 출발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장면이다. 그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만 문영은 자신이 가진 계절의 흐름을 따르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겨울. 상실과 상처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