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트랩 Trap> 공연사진
서울시극단
초른은 트랍스를 평범한 회사원에서 승진을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는 인물로 설명하며, 트랍스가 뭔가 거창하고 특별한 일을 한 것처럼 말한다. 변호사 쿰머는 검사의 논거가 터무니없다고 반박하고, "트랍스는 그럴만한 위인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트랍스는 되레 발끈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필자의 눈앞에 하나의 구도가 그려졌다. 트랍스에게 있어 유죄는 가치에 대한 인정, 무죄는 가치에 대한 무시라는 구도다. 트랍스는 피고답지 않게 유죄를 갈구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사 역할을 맡은 집주인은 트랍스의 유죄를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한다.
이제껏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필렛'이라는 노인도 등장하는데, 필렛은 무가치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전직 사형집행관이었는데, 사형이 선고된다 한들 집행되지 않았으니 일없이 긴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스스로 무가치함을 체감했다.
모의재판에서도 마땅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검사 초른은 피고의 죄를 들춰내고, 변호사 쿰머는 피고를 성실히 변호하지만, 필렛에게는 일이 없다. 판사가 사형을 선고했지만, 모의재판인 만큼 실제로 사형을 집행할 순 없으니 필렛은 케이크를 건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한다.
사실 모의재판 자체도 노인들의 무가치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은퇴한 전직 법조인들이 택한 모의재판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할 것 없는 노인들의 유치한 놀이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이렇듯 연극은 무가치함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사형을 선고받은 트랍스가 내리는 마지막 선택은 어떻게 보면 반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지켜본 관객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 선택은 기괴하기까지 한데, 이 과정이 궁금하다면 관람을 권한다.
<트랩>이라는 극의 제목과 함께 '덫'을 상기시키는 '트랍스'는 김명기가 연기하고, '집주인'은 남명렬, '초른'은 강신구, '쿰머'는 김신기가 각각 연기한다(독일어로 초른은 분노를 뜻하고, 쿰머는 걱정을 뜻한다). 이어 '필렛' 역에는 손성호, 하인 '시모네' 역에는 이승우가 캐스팅됐다.
전 배역 원캐스트로 공연되며, 연극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오는 20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