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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리뷰]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24.10.10 14:48최종업데이트24.10.1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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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닳은 책이 < WHY? 사춘기와 성 >이던 나의 중학교 시절, 남자아이들은 툭하면 "너 걸레냐?"고 물었다. 그들이 말하는 걸레의 범주는 너무 넓어서 포함되지 않는 여자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남자친구가 자주 바뀌어도, 고백을 많이 받아도, 성교육 시간에 웃어도 '걸레'가 됐다. 정작 그들은 틈만 나면 AV 배우의 신음 소리를 흉내 냈지만, 결코 걸레가 되진 않았다.

고등학교 때 다닌 학원 화장실에는 처녀막 재건 수술 광고지가 붙어 있었고, 대학교 때는 자신의 전 애인이 알고 보니 걸레였다는 취중진담을 들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자리를 박차고 싶었다. 너도 있고 나도 있는 게 성욕인데 왜 네가 하면 본능이고 내가 하면 걸레야?

소리 없는 아우성을 삼킬 때 나보다 먼저 일어선 여자를 만났다. 분명 새벽 2시 50분쯤 대학가 '투X리'에서 만난 거 같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속 구재희(김고은 분)다.

재희는 왜 '걸레'가 됐나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대학교에서 재희의 별명은 걸레다. 어쩌다 그런 호칭이 붙었는지 되짚어보면 그 시작은 어느 대학에나 있을 법한, 인기 있는 여성의 비애다.

재희는 인기가 많다. 그래서 남학우들은 자신이 먼저 그를 가질 것이라며 서로 순번을 따지고, SNS 단체 채팅방에서 성희롱한다. 하지만 재희는 누구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클럽에서 놀기 바쁘다. 내 사랑은 받아주지 않는데 다른 남자와 논다고? 그럼 역시 걸레라는 게 그들의 논리다.

삽시간에 재희가 걸레라는 소문과 함께 불법촬영물이 퍼졌고, 영상 속 인물이 재희라는 말이 나돌게 된다. 학생들은 영상을 유포한 사람보다 재희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재희는 강의실 단상에 올라가 상의를 들치고 "나의 가슴에는 그런 점이 없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당당한 재희를 더욱 경멸하며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보이냐"며 헤프다고 조롱한다.

낙인이 찍힌 재희의 학교생활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마주칠 때마다 수군거리고 새로 사귄 남자친구는 "너 같은 걸레랑 누가 만나고 싶겠냐"고 이별을 고한다. 성생활 중에 임신하게 된 재희는 병원에 가지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도덕적으로 힐난하는 의사와 싸우게 된다. 결국 재희는 "내가 그런 여자면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이냐"고 자조적인 물음을 던진다.

재희는 자신의 몸이 소중해서 성생활을 즐기는 인물이다. 시간은 흐르고 청춘은 아깝기에 그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성관계를 갖는다. 그 과정에서 재희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섹스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여성이 성욕을 드러내면 여전히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지탄이 따르는 분위기다. 특히 누구도 가진 적 없는 몸, 즉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뜻깊은 일인지라 사회는 그토록 '처녀'를 좋아하고 '걸레'를 내몬다. 무지한 논리에 재희도 무너질 뻔했지만, 여전히 팔목에는 클럽 입장권이 걸려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폭력적인' 남자들에게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는 데이트 폭력에 관한 장면을 추가했다. 언론 인터뷰에서 이언희 감독은 "시나리오를 5명의 여자가 썼는데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을 이야기하면서 지금의 시나리오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어떠한 작품보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데이트 폭력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재희를 스토킹했던 남자는 자취방 3층까지 올라와 속옷을 훔쳤다. 술집에서 만난 남자는 일부러 독한 술을 먹여 정신을 잃은 재희와 성관계를 가졌다. 재희와 교제한 남자는 술에 취해 무단 침입해 나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며 폭력을 행사했다. 모두 분절된 에피소드였지만, 큰 그림에서 같았다. 여성의 사랑은 언제나 안전하지 않다.

재희가 겪은 일은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사건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에 피해자는 늘 혼란스럽다. 재희가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고 통제하는 애인을 떨쳐내지 못했듯 현실 속 피해 여성들은 애착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이기에 가해자를 감싸려 하거나 폭력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침내 재희가 폭력적인 애인을 뿌리치고 맨발로 경찰서에 달려갈 때 점점 거칠어지는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여성들이 저런 호흡으로 도망쳐 왔을까. 여자들은 너무나 쉽게 '걸레'가 될 수 있고 폭력의 위험에 노출돼 있어서, 세상에 통하는 사랑법과 도통 맞지 않는다. 대도시에만 새로운 사랑법이 필요한 게 아니다.

어떤 작품은 정면으로 관객을 향한다. 무언가 고발하려는 작품이 그렇고 우악스러운 기법을 쓰는 것도 그렇다. 이 영화도 정면으로,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왔다. 대체 왜? <대도시의 사랑법>은 관객과 친구가 되고 싶나 보다. 재희가 쓰는 언어가 너무 나의 것과 닮아서 바로 합석했다.

솔직히 이상한 양말을 신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이 없는데, 재희는 오색 양말을 신는다. 막차 말고 첫차 탈 것 같은 친구를 만나서 오늘 밤이 길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포스터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포스터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대도시의사랑법 김고은 노상현 LOVEINTHEBIGCITY KIMGO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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