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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도 더 된 셜록은 왜 아직도 세련된 걸까

[김성호의 씨네만세 844] BBC <셜록> 시즌2

24.10.02 11:17최종업데이트24.10.0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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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집 시리즈로 국내에 꽤나 명성이 높은 어느 출판사는 전집 발간의 변으로써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놓았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새 출간물에도 한참 지난 옛 번역을 가져오기 일쑤인 출판사의 행적이 그 포부를 무색케 하지만, 이 문장 하나 만큼은 때때로 다시 곱씹을 만한 명문이다. 고전은 새로 번역돼야 한다. 먼지 쌓인 옛 이야기가 오늘의 감수성과 괴리될 밖에 없는 탓이다. 오늘의 독자에게 오늘의 번역을 전해야 한다는 이 글은 문학, 나아가 콘텐츠 산업의 본령을 생각하도록 한다.

한편으로 어째서 번역인지 생각해볼 밖에 없다. 오늘의 독자에게 어제의 작품이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을 전하지도 못하게 되었다면, 번역이 아닌 창작이 그 대안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셜록 포스터

▲ 셜록 포스터 ⓒ BBC


지나간 이야기를 시대에 맞게 전하는 것

그럼에도 이들은 번역이라 말한다. 그건 지나간 고전에 여전히 곱씹을 만한 매력이 있기 때문일 테다. 새로 번역하여 오늘에 다시 소개하는 일이 오늘의 창작만으로 쉬이 전할 수 없는 가치를 빚어내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를 진동케 한 작품, 그에 담긴 이야기,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캐릭터를 통해서만 마주할 수 있는 지성과 감각의 세계가 있음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셜록> 시즌2는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한다. 지난 시대, 무려 100년도 넘게 지난 아서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여 새 시대에 맞는 옷을 입힌 덕이다. 이제껏 탐정 셜록 홈즈와 그 보조 존 왓슨을 내세운 작품이 적지 않게 나왔음에도 <BBC>가 야심차게 준비한 <셜록> 시리즈는 완전히 차별화된 작품이라 할 밖에 없다. 그건 이제껏 나온 다른 작품들이 기계적 번역을 거듭해온 데 반하여 <셜록>은 새 시대에 맞는 번역을 해낸 탓이 아닌가 한다.

단 세 편의 에피소드로 공개된 시즌1은 대성공이었다. 통상적인 드라마 캐스팅의 규격을 파괴하고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마틴 프리먼,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명우들을 주연으로 선발한 선택이 주효했다. <닥터 후> 성공의 주역 중 하나인 스티브 모팻이 직접 방향타를 잡은 작품은 매 회차가 큰 관심을 모으며 순항했다. 평균 시청자수만 740만 명에 이르는 높은 시청률을 바탕으로 작품은 영국 뿐 아니라 전 세계로 수출됐다. 특히 경쟁적으로 보급된 OTT 서비스 배급망을 등에 업고 제작 뒤 10여 년 간 많이 재생된 드라마 시리즈 목록 최상단을 지킨 건 영국 드라마 산업의 자존심이라 해도 좋겠다.

셜록 스틸컷

▲ 셜록 스틸컷 ⓒ BBC


여성혐오자 셜록의 변화, 그 매력적 순간

2010년 선보인 시즌1으로부터 1년 반의 준비기간이 있었다. 똑같이 3부작으로 선보인 작품은 더욱 높아진 기대 속에서 셜록 홈즈와 존 왓슨, 악역인 제임스 모리어티를 어떻게 활용할지가 큰 관심을 모았다. 세기를 건너 새 옷을 입은 그들이 달라진 런던을 활보하며 벌이는 모험과 대결이 시청자를 어떤 감정과 감각으로 이끌지 기대하는 이가 많았다.

첫 에피소드는 '벨그라비아 스캔들(A Scandal in Belgravia)'이다. 제목부터 코난 도일의 단편 '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원작으로부터 그 기본적 착상만 빌려왔을 뿐, 모든 면에서 진전된 변주가 이뤄진 에피소드다. 스마트폰과 SNS 등 시대상을 잘 드러내는 도구를 주요하게 활용하는 건 기본, 셜록 홈즈를 뒤흔드는 여성 아일린 애들러(라라 펄버 분)를 등장시켜 이제껏 알던 홈즈의 캐릭터를 깨어놓는다.

실제 코난 도일의 작품군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는 아일린이다. 원작에선 홈즈에게 물을 먹이고 최종 승리자가 되는 그녀가 아닌가. 여성은 남성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정신과 의지를 가졌다는 당대의 인식 가운데서, 특히나 노골적으로 남성우월적인 사상을 드러내는 홈즈에게 완벽한 한 방을 먹이는 캐릭터가 그녀란 점에서 <셜록>이 아일린을 불러온 건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홈즈는 아일린을 겪은 이후 여성에 대한 편견을 일부, 아주 일부이기는 하지만 수정하기에 이르고, 바로 이를 인상적으로 바라본 독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리즈의 키를 쥐고 있는 스티브 모팻이 바로 그다. 그는 한국 내한 당시 인터뷰에서도 아일린이 등장하는 편을 반드시 다루고 싶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 인간, 그것도 홈즈와 같이 평범한 이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지성을 가진 이에게도 제 세계가 완전히 흔들릴 때가 있단 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하물며 그것이 인류의 절반을 이룰 여성이란 존재로부터 비롯된다면야. 홈즈는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실패한 듯 보인다. 그러나 모팻은 그를 그저 패배자로 남겨두지 않는다. '벨그라비아 스캔들'을 시리즈 가운데 최고로 꼽는 이가 많다는 건 이 작품이 지나간 캐릭터의 한계조차 수습하여 한 층 발전한 이야기를 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셜록 스틸컷

▲ 셜록 스틸컷 ⓒ BBC


홈즈와 왓슨, 그리고 모리어티

두 번째 에피소드 '바스커빌의 사냥개'는 <셜록>이 반드시 다루어야 할 에피소드란 점에서 관심이 작지 않았다. 도일의 대표작 '바스커빌 가의 개'를 최대한 충실하게 재현하면서도 현대적으로 변주하길 포기하지 않은 지점에서 이 작품이 빚어졌다. 유전자조작을 비롯한 과학기술과 음모론적 설정, 원작 특유의 괴물과 개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며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원작을 존중하면서도 창의적으로 극을 재구성하는 방식은 <BBC> 드라마의 장기이기도 한데, <셜록>이 전 세계적이라고 해도 좋을 신규 창작극의 기근 가운데서도 양질의 에피소드를 거듭 내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한다.

첫 시즌이 고작 세 편, 다음 시즌도 겨우 세 편으로 짜인 <셜록>이다. 아무리 원작이 있다손 치더라도 인물의 성격과 그에 따른 사건들, 다른 인물과의 관계 등을 효과적으로 펼쳐내야 할 밖에 없는 일이다. 주어진 러닝타임이 명확한 만큼 인물의 사연과 성정을 드러내는 작업에 공을 기울여야 한다. '바스커빌의 사냥개'는 셜록의 과거를 차츰 관객 앞에 펼쳐내기 위한 디딤돌이기도 하거니와 공포와 미스터리가 뒤섞인 장르물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편으로 제 기능을 다한다.

마지막 에피소드 '라이헨바흐 폭포'는 충격적 반전으로 시리즈를 비로소 전 세계적 작품으로 끌어올렸단 평가를 받는다. 도일의 원작에서도 홈즈의 죽음과 복귀를 다룬 에피소드가 강렬함을 남겼지만,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시리즈 가운데 주인공을 죽이는 선택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드라마 팬들에게 현재적 충격을 안기기 충분했다.

원작에서도 가장 큰 맞수였던 모리아티와 두 시즌에 걸쳐 두뇌싸움을 펼친 홈즈다. 드라마에서 모리아티의 캐스팅과 연기력, 캐릭터가 아쉽다는 비판엔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최고의 작가진이 포진해 써낸 각본만큼은 저기 자본력 있는 할리우드 드라마에 비해서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인상적으로 나아간다. 모리아티와의 심리전 끝에 빌딩 옥상에 선 홈즈와 아래에서 그를 지켜보는 왓슨의 모습은 다가오는 시즌3 이후부터가 진정한 시리즈의 시작이 될 수 있으리란 걸 시청자에게 알린다.

셜록 스틸컷

▲ 셜록 스틸컷 ⓒ BBC


영국 드라마가 전 세계를 사로잡는 방법

시즌1을 뛰어넘는 완성도와 뜨거운 시청률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원작을 향한 존중이 느껴지는 변주와 더 깊어진 캐릭터 묘사, 여전한 구성력까지, 잘 풀리는 드라마의 비결을 알도록 한다. 영국 내 평균 시청자수 920만 명을 기록해 전작의 성취를 뛰어넘은 건 자연스런 일이다.

<셜록> 시즌2는 <닥터 후> 시리즈의 해외판매 기록도 모조리 갈아 치웠다. 무려 180개국 이상의 국가에 수출돼 작품을 세계적 흥행작으로 만들었다. 특히 중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 문화권에선 자국 내 대표 콘텐츠 못잖은 인기로, 셜록 신드롬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중국에선 이후 비슷한 추리물이 쏟아져 트렌드를 주도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한국에서도 각종 OTT서비스에서 가장 많이 조회된 드라마 중 하나로 기록돼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셜록> 시즌2는 영국 드라마 산업의 저력을 내보인다. 스티브 모팻을 위시한 드라마 산업의 걸물과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원하는 방송국, 영어문화권의 장점을 살려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배우들, 꾸준히 양질의 콘텐츠를 쏟아낼 수 있는 작가진까지가 하나하나 성공의 이유가 된다. 여기에 더하여 지금 바로 소환해 변주해도 문제가 없는 100여 년 전 콘텐츠의 우수함과 이를 향유하며 즐길 수 있는 내수시장까지 확보돼 있으니 영국의 드라마 산업만큼은 해가 저물지 않는 왕국을 이루었다 해도 좋겠다.

K콘텐츠의 인기가 뜨겁다 자평하는 한국의 오늘은 어떠한가. 하나하나 작품군을 뜯어보면 소재고갈 속에서 자극적이기만 한 이야기를 재생산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지난 몇 년 간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서비스에서 한국산 콘텐츠 제작을 적극 지원해 세계에 선보이는 사례가 줄을 이었다. 이를 통해 <킹덤> <오징어 게임> < D.P > 등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 OTT서비스 업체가 한국 콘텐츠 제작지원 규모를 줄이고 태국 등 동남아로 옮겨간다는 풍문이 들려온다. 세계적으로 매력을 발할 수 있는 한국 콘텐츠가 얼마 되지 않고, 양질의 이야기 또한 꾸준히 나오지 않는다는 판단이 이유가 됐다는 평이다. 영화계에서도 소위 10위권이라는 이름난 감독들까지만 주요 OTT서비스 업체와 좋은 계약을 체결할 뿐이지, 그 아래는 십수년 전보다 나아진 게 없는 실정이다. 한국 콘텐츠 시장의 특수함과 특장점을 뚜렷하게 제시할 수 없는 가운데 산업의 흐름은 서서히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상황에서 꾸준히 시리즈를 이어가는 <셜록>의 위용은 본받음직하다. 반 세기를 이어온 <닥터 후> 시리즈에 이어 BBC는 <셜록> 또한 저들의 확고한 오리지널 콘텐츠로 만들어냈다. 여기서 역량을 키운 제작자며 작가진은 또 다른 드라마 콘텐츠를 일으키는 데 힘을 모은다. 전 세계로 통하는 콘텐츠와 기본에 충실한 구성, 자극적 소재를 배제하고 품격을 지키는 이야기가 영국 드라마를 세계 선두권에 놓도록 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가 있는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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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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