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tvN 스토리
이 무렵의 광종은 즉위 초기와 달리 참소(讒訴)를 무분별하게 수용했고, 일단 혐의를 받은 이들에게는 가혹한 처벌을 내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호족 세력에 대한 상호 견제와 인적 청산을 위한 광종의 '연출된 행위'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광종의 입장에서는 재위 10여 년간 지속적인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데다 비협조적인 호족 세력에게 위기의식을 느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제는 이로 인하여 고려 조정에 대상을 가리지 않고 근거 없는 고발과 모함이 횡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태조의 개국공신이자 평주의 대호족이던 박수경 역시 아들들이 역모 혐의로 수감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화병을 얻어 사망하기에 이른다.
<고려사>에는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이 뜻을 얻어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였다, 종이 주인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하니 감옥이 늘 넘쳐나 별도로 임시감옥을 두었다"는 등 그 폐해를 기술했다.
광종의 폭정은 단순히 호족 숙청만이 아니라 오래된 공신과 장수들, 왕족들에게까지 피바람을 몰고 왔다. 태조 시대에 최대 3200여 명에 이르렀던 공신은, 불과 20년도 안 되어 불과 40여 명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물론 자연사한 경우도 있었지만 광종의 숙청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또한 광종은 선왕의 아들들이자 자신에게는 조카가 되는 흥화궁군(혜종의 아들), 경춘원군(정종의 아들)마저도 거짓 역모 혐의에 연루시켜 처형했다. 광종 입장에서는 호족들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위 계승 명분이 있는 조카들의 존재가 언제든 반란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급기야 광기에 싸인 광종은 자신의 친아들인 태자 왕주(훗날의 경종)마저 외가에 결탁해 반역을 모의했다고 의심했으나 아내 대목왕후의 강력한 만류로 처벌은 면했다. 한때 광종이 꿈꾸던 개혁 정치는 어느새 자기 혈육도 믿지 못할 만큼 의심과 공포, 살육만 난무하는 독재정치로 변질되어 있었다.
말년에 이르러 광종은 언제부터인가 거듭된 숙청에도 스트레스와 환멸을 느꼈는지,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사찰을 건립하고 기도를 하는데 많은 시간과 재정을 낭비했다. 오죽하면 광종이 불교를 후원하는데 1년간 들인 비용이 아버지 태조의 10년 치 비용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불교를 너무 깊이 믿으시고, 복과 장수를 구하며 기도만 일삼으시니, 한정된 재력을 다 쓰면서 무한한 인연을 만들려 하셨다"며 말년에 변질된 광종의 행보를 비판했다.
975년, 광종은 재위 26년 만에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결과적으로 광종의 공포정치가 낳은 업보는 결국 그의 사후, 후대까지도 악영향이 이어지게 된다.
광종 때 억울한 참소로 희생된 이들이 하도 많다 보니, 후대인 경종 시기에는 원한에 대한 사적제재를 허용하는 희대의 악법인'복수법'이 탄생한다. 이로 인하여 한때 호족과 왕족들까지도 서로 죽고 죽이는 난장판이 벌어진 끝에 얼마 가지 않아 폐지된다.
아들 경종이 방황을 거듭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어린 시절 아버지 광종으로부터 받은 각종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다. 이를 두고 광종과 비슷한 행보와 업적을 남긴 후대의 조선 태종 역시 비록 숙청에는 잔혹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후계자인 세종의 태평성대에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것과 가장 비교되는 부분이다.
훗날 성종대에 최승로는 광종의 업적을 논하며 "광종께서 항상 공손하고 겸손해 처음과같이 정사를 부지런하게 하셨다면 어찌 향년 50세에 그쳤겠습니까.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합니다"라고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광종의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본래의 개혁 의지에서 변질되어 결국 스스로의 수명까지 재촉했다는 신랄한 평가였다.
광종은 분명히 개혁정책과 왕권 강화로 호족들을 제압하며 고려 발전의 초석을 놓은 군주였다. 다만 최승로의 평가처럼 후대로 갈수록 무리한 독선과 숙청으로 폭군의 면모를 드러낸 거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광종을 두고 그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고민했던 인물인 동시에, 그 시대의 한계 또한 드러내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그 시작만큼이나 마무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