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tvN 스토리
하지만 재위 8년 차를 넘기며 광종은 서서히 숨겨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956년 광종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전격 시행하며 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신분을 회복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고려 초에는 양인들이 후삼국 통일전쟁 중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져서 호족의 노비가 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노비가 호족의 개인 재산에 불과했다면, 양인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주요 생산계층이었다. 광종 입장에서는 노비안검법을 통하여 호족의 재정적 기반과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국가의 재정까지 더 풍족해지게 만드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조치였다.
당연히 호족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고려 건국 이래 호족의 재산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고 한 군주는 광종이 최초였다. 학계에서는 광종이 이미 오래전부터 노비안검법을 구상했으며 즉위 초기의 유화책은 호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해석한다. 광종은 호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비안검법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른바 '왕권강화의 시기'로 불리는 광종 2기의 서막이었다.
광종은 2년 뒤인 958년에는 과거(科擧) 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인재를 시험으로 선발하게 했다. 또한 공복 제정을 통하여 관리를 4등급으로 나누고 품계에 따라 관복의 색상을 다르게 정하여 조정의 질서를 확립했다.
특히 광종이 도입한 과거제는 고려를 넘어서 후대인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기까지 무려 936년간이나 존속하며 인재 등용 시스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호족들은 이제 혈통 중심으로 세습되어 오던 기득권을 실력으로 증명해야 하는 세상을 맞이했다.
과거제도 시행을 주도한 것은 쌍기(雙冀)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 후주의 인물로 사신단으로 왔다가 광종의 총애를 받아 한국에 귀화한 중국인이었다. 광종은 쌍기의 총명함을 높이 사서 측근으로 중용했고, 그에게 과거제를 비롯한 고려의 주요 개혁정책을 주도할 브레인 역할을 맡겼다.
광종은 쌍기 외에도 많은 귀화인 출신들을 기용하고 우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광종이 고려의 기득권 호족 세력과 연관이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친위세력을 키우려고 했던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는 광종이 "쌍기를 등용한 뒤로 문사들을 높이고 등용하며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셨다"고 평가하며 노골적인 귀화인 우대정책에 대해 고려인 신하들의 불만이 컸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광종의 이러한 왕권 강화 행보는 여러모로 후대인 조선왕조의 3대 국왕인 태종 이방원과 매우 유사하다. 태종 역시 혼란했던 건국 초기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 질서를 확립하고자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다. 정적들에 대한 가차 없는 숙청과 냉혹한 면모 역시 광종과 태종이 일치하는 부분이다.
광종 치세 말기인 3기는 이른바 '호족청산과 공포정치의 시대'로 요약된다. 광종 11년인 960년, 하급관리인 권신에게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참소를 듣자 광종은 이들을 삭탈관직하고 내쫓았다. 광종은 일방적인 고발만 듣고 뚜렷한 증거 없이 신하들을 처벌했다. <고려사>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기 어렵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광종은 이전과는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피바람 몰고 온 광종의 폭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