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
(주)엣나인필름
기독교를 통한 시대 인식
<희생>이 발표된 1986년, 세계는 전쟁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도 전쟁 공포가 공존하지만 당시 동서냉전의 끝단에서 세계인이 느낀 공포는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예술의 자유를 찾아서 가족과 생이별하며 조국 러시아를 탈출한 타르코프스키의 망명자 신분 자체에 당시 상황에 관한 많은 함축이 있다.
영화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주인공 알렉산더가 한 일은 하녀 마리아와 동침한 것이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비유이다.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마리아라는 이름은 예수의 어머니 성모를 지시한다. 신약성서의 동침과 상징으로서 수태가 영화에 차용된다. 그리스어 어원상 '인간의 수호자'란 뜻을 갖는 알렉산더의 역할은 중층적이다.
영화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곳곳에 출현한다. 다빈치의 그림은 마리아와 동침으로 연결되고 '마태 수난곡'은 영화의 주제와 맞닿았다. '마태 수난곡'은 마태의 수난을 다룬 것이 아니라 예수의 수난을 다루었다. 영화에 마리아 외에 마르타(다른 하녀)까지 나오니 예수를 상징하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 극중 아이의 이름은 '고센(Gossen)'이란 스웨덴어로, 영어로는 'Little Man'이란 뜻인데 그대로 'Little Man'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고센은 어린 예수의 후보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스토리라인을 보면 기독교 구원방정식이 거의 적용됐다는 걸 알 수 있다. 동정녀 출산을 다루진 않는다. 영화 말미에서 알렉산더가 정신병원에 끌려가고 난 뒤에 마리아와 고센이, 부자가 함께 심은 죽은 나무 근처에서 마주치게 한 설정은, '마태 수난곡'과 맞물려 암흑의 시대에서 행한 타르코프스키식의 희망 모색을 보여준다.
희망 모색의 절정은 영화사에서 대표적 롱테이크로 꼽히는 방화 장면이다. 많은 비평가가 이 방화를 알렉산더의 희생으로 해석할 텐데,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내가 보기엔 번제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제의다. 제의엔 희생이 필요하다. 알렉산더가 자기가 지닌 걸 희생한다는 해석은 너무 일면적이다. 살던 집을 불 지르고 정신이상으로 오인 받으며 병원에 끌려가는,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 전체를 희생으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아들을 남기고 아름다운 자신의 집을 불 지르고 끌려가는 알렉산더의 모습을 통해 타르코프스키는 신의 자기희생과 구원 계획을 시사한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심판과 자기희생을 등치 함으로써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암시를 한다. 아들 고센은 구원과 희망의 상징이다.
동시에 인간의 자기희생과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는 것과 같은 단호하고 집요한 희망 수행을 요청한다. 신의 희생에 상응하는 인간의 희생과 변화가 필요하다. 알렉산더는 신학적으론 신이고 사회학적으론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