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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20대에게 영화의 꿈 심어준 박건섭의 '토요단편'

[부천영화제] 단편영화 역사 재조명한 '토요단편의 기억과 회복' 특별전 열려

24.07.10 16:22최종업데이트24.07.1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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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일 저녁 상영된 부천영화제 '토요단편의 기억과 회복' 특별전 끝나고 이어진 포럼에 참석한 감독들. 왼쪽부터 육정학 평론가(사회), 장길수 감독, 최정현 감독, 이정국 감독, 강제규 감독, 김경식 감독

8일 저녁 상영된 부천영화제 '토요단편의 기억과 회복' 특별전 끝나고 이어진 포럼에 참석한 감독들. 왼쪽부터 육정학 평론가(사회), 장길수 감독, 최정현 감독, 이정국 감독, 강제규 감독, 김경식 감독 ⓒ 부천영화제 제공

 
1980년대 20대 파릇파릇한 나이에 새로운 영화를 꿈꾸던, 그래서 지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영화의 토대를 만든 중년의 영화인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8일 저녁 부천 CGV 소풍에서 진행된 '토요단편의 기억과 회복' 특별전은 1980년대 한국 영화운동의 토대가 됐던 단편영화의 역사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시간이었다.
 
이번 특별전 상영작은 7편으로 <강의 남쪽>(장길수 감독), <뫼비우스의 딸>(김의석 감독), <방충망>(최정현 감독), <땅밑 하늘공간>(강제규 감독), <백일몽>(이정국 감독), <상흔>(최정현 감독), <터널>(김경식 감독) 등이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1980년대 토요단편에 상영된 작품이라는 점이다. 토요단편은 1982년 9월 4일 시작해 1986년 12월 13일까지 4년 3개월간 프랑스문화원에서 진행됐던 단편영화 발표회였다.
 
이를 만들었던 사람은 당시 프랑스문화원 영사기사였던 고 박건섭 부천영화제 부집행위원장(2022년 1월 별세). 영화를 좋아하는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프랑스문화원을 오가며 검열받지 않은 영화를 보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던 당시, 이들이 제작한 단편영화가 하나둘 만들어지던 모습을 보던 박건섭은 창작 의지를 북돋기 위한 목적으로 매주 한편씩 단편영화를 볼 수 있는 장을 만든 것이었다.
 
처음은 외국영화로 시작했으나 이후 영화 청년들이 만든 한국 단편영화 상영도 점차 늘어났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173회 상영에서 외국작품 162편과 한국 단편영화 136편이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영화의 경우 이장호 감독 <바보선언> 예고편, 정지영 감독 <추억의 빛> 등이 상영되기도 했는데, 순수 단편영화는 88명의 영화학도가 만든 126편이었다.
 
박건섭과 프랑스문화원에 대한 추억
 
 프랑스문화원 토요단편을 진행했던 고 박건섭 부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프랑스문화원 토요단편을 진행했던 고 박건섭 부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 최정현 제공

 
8일 상영작들은 80년대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8mm~16mm로 만든 작품들이었다. 장길수 감독 <강의 남쪽>은 강남이 한참 개발되고 있을 때 삶에 찌들린 함바집 부부의 싸움을 그린 작품이었고, 이정국 감독 <백일몽>은 하숙집 주인 딸을 짝사랑하는 구직 청년의 소심한 삶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영화로 당시 단편영화제 수상 등으로 주목받았었다.
 
강제규 감독 <땅밑 하늘공간>은 1980년대 청년들의 꿈과 현실에서의 좌절 등을 기차 안에서 고뇌에 빠진 청년을 통해 드러낸 작품이다. 최정현 감독 <방충망>은 경찰이 진을 치고 있는 서울대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학생들을 형상화한 애니메이션으로, 대부분 작품이 당시 20대 청년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화 상영 후 육정학 평론가의 사회로 이어진 '토요단편의 사실과 의미'에 관한 포럼은 상영 작품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건섭이 형'으로 불렀던 고 박건섭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으로 꾸며졌다.
 
장길수 감독은 유머가 있었던 '건섭이 형'을 이야기하며 "<강의 남쪽>은 군대 제대 후 영상시대 동인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이정국 감독은 "신문에 있는 짧은 내용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모든 것이 토요단편이 있어서 가능했다"며 역시 '건섭이 형'에게 감사를 전했다. 강제규 감독은 만든 지 40년 만에 다시 보는 단편에 대한 감회와 함께 "1980년대 대학생 시절 프랑스문화원이라는 공간이 특별했다. 박건섭이 있었기에 상영이 가능했다"고 그리움을 나타냈다.
 
청주대 연극영화과 교수인 김경식 감독은 "박건섭은 항상 웃는 분이었다"며 "'영화라는 꿈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다. 산을 넘거나 우회하지 않고 뚫고 간다는 의미로 <터널>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방충망> <상흔>의 최정현 감독은 당시 어떤 모임에 갔다가 경찰에 연행돼 1주일 만에 나올 수 있었다"며 "풀려난 후 박건섭 형에게 연행됐던 이야기를 했고, 토요단편에서 상영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영화의 꿈 키우게 한 '토요단편'
 
 1986년 10월 11일 이정국 감독 <한여름 낮의 꿈> 토요단편 상영 후. 왼쪽부터 시계방향 정재형 교수, 이정국 감독, 전찬일 평론가, 이주성, 박건섭 선생. 이하영(시나리오 작가)

1986년 10월 11일 이정국 감독 <한여름 낮의 꿈> 토요단편 상영 후. 왼쪽부터 시계방향 정재형 교수, 이정국 감독, 전찬일 평론가, 이주성, 박건섭 선생. 이하영(시나리오 작가) ⓒ '토요단편의 기억과 회복' 추진위 제공

 
상영작 감독들 외에 토요단편에서 작품을 상영했던 감독들도 관객석에 앉아 당시를 회상했다. 1984년 4월 당시 대학생으로 단편영화 <석>을 제작해 상영했던 양지은 감독은 "작품에 대한 칭찬을 받아서 감독으로 살고 싶었다"며 "프랑스문화원에서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를 다 보고 영화(인)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86년 12월 토요단편 마지막 상영이었던 <슈퍼마켓>을 연출한 지성현 감독은 이후 연출부로 들어가 <아제아제 바라아제> 제작에 참여했고, CF 감독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면서 지난 시간을 추억했다. 
 
이날 상영회에는 한국 여성실험영화 운동의 선구자인 한옥희 감독을 비롯해, 채윤희 전 영상물등급위원장, 서명수 감독, 박건섭 선생이 충무로에 카페를 차렸을 당시 교류하고 도움을 받았던 이미정 캐나다한국영화제 창설자, 전찬일 평론가 등이 참석했다. 
 
부천영화제는 이번 특별전에 맞춰 토요단편의 역사를 정리한 책 <토요단편–지나온 길 걸어갈 길>을 출간했다. 박건섭 선생이 세세하게 기록해 놓은 토요단편 상영일지가 정리돼 있는데, 자칫 묻힐뻔했던 상영 기록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풍부하다.

박건섭의 토요단편 상영회 때 옆에서 심부름하며 도왔던 낭희섭 독립영화협의회 대표가 책 발간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이날 참석한 박건섭 선생 부인에게 증정됐다. 

'토요단편의 기억과 회복' 특별전은 처음에는 관객이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8일과 13일 두 번의 상영 회차가 전부 매진되면서 부천영화제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상영작 감독과 토요단편 관련 초청 내빈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해 부랴부랴 상영관 하나를 추가로 확보해야 했다. 국내외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1980년대~199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의 척도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부천영화제 토요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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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주요 영화제, 정책 등등)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각종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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