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4000BPM>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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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BPM>
한국 / 2023 / 극영화
감독 : 황지완
"줄넘기 다 했어? 어디 봐. 4000개 다 채웠나."
집 아래 공터에서 줄넘기를 하던 상훈(유연석 분)은 엄마(정도희 분)가 시킨 4000개까지 한 개를 남겨두고 공동 현관의 인터폰을 누른다. 3999개. 정확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엄마는 나머지 한 개를 다 채우고 집으로 들어오라지만, 만보기의 수는 아무리 뛰어도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고장이 난 것 같다. 최근 들어 매일 이렇게 내려와 줄넘기를 뛰었으니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상훈은 만보기의 수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보같이 계속해서 줄을 넘는다. 자신이 넘는 줄넘기의 수보다는 기계에 기록되는 수치를 꼭 맞추고야 말겠다는 듯이.
영화 <4000BPM>에는 다른 영화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전개 방식, 그중에서도 특히 위기의 형성에 해당하는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4000개의 줄넘기를 넘어야 하지만 만보기의 고장으로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위기다. 귀엽고 사소한 위기.
하지만 이 걱정 역시 그의 줄넘기를 몰래 지켜보던 선아(서이수 분)가 등장하며 흩어지고 만다. 두 사람 모두 할 줄 모르는 2단 뛰기를 위해 번갈아 넘던 줄넘기 줄은 곧 원래의 용도와는 무관한 놀이의 도구가 된다. 황지완 감독이 두 사람의 저항 없이 깨끗하고 해맑은 모습을 통해 그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훈이 선아를 만나게 되면서, 줄넘기는 이제 더 이상 엄마가 정해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게 된다. 이 사실은 선아가 등장하기 이전과 이후, 두 장면에 걸쳐 표현되는 상훈의 표정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처음부터 프레임의 중심에 놓여 있던 인물이 상훈이어서 그의 표정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지, 선아 또한 그렇다. 상훈의 외로운 줄넘기를 물끄러미 몰래 쳐다보던 처음의 모습, 그녀의 손에는 무거운 책가방이 들려 있었다. 조금은 지쳐 보이는 듯한 그 표정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선아 역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 공부로 추정되는 목표를 엄마에 의해 강요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잠깐의 즐거운 시간 뒤로 그녀를 부르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힘을 더한다. 그렇게 두 인물은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상훈에게는 조금 더 중요한 메타포가 놓인다. 자신을 부르는 자동차 경적 소리를 향해 떠나던 선아는 그가 어쩐지 키가 조금 큰 것 같다는 말을 남긴다. 상기된 표정의 상훈은 비장한 표정으로 이제까지 목에 걸고 있던 만보기를 벗어내는데, 여기에는 분명 성장의 은유적 표현이 담겨 있다. 부모가 정해준 목표가 아닌 자신이 설정한 목표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과 동시에 누군가의 품을 벗어나 자신의 세상을 구축하겠다는 삶의 새로운 시작점에 대한 암시다.
영화 <4000BPM>에는 많은 것들이 놓여 있지 않다. 단단히 채워진 이야기는 그 길이나 볼륨과 무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이 증명한다. 상훈의 마지막 표정을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잠시 잊고 살았던 순수했던 날의 때 묻지 않은 감정이 느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