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크리스천스> 공연사진
두산아트센터
연극을 관통하는 질문
"지옥은 없다", 폴은 작정하고 설교한다. 자신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불길에 휩싸여 죽은 한 소년의 사례를 이야기하며, 소년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지옥에 가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불신지옥'을 부정한 것이다.
이를 통해 폴은 너그러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고백한다. 신앙에서의 단일한 길, 그리고 그에 따른 배제를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도 천국에 있다"는 말까지 하고, 교인들은 혼란에 빠진다.
부목사 조슈아는 즉각 반발한다. 그런 조슈아를 두고 폴은 언제든 이 교회를 떠나도 된다고 말하고, 교인들에게 자신을 따를 것인지 조슈아를 따를 것인지 투표하게 한다. 이때 조슈아는 50명의 선택을 받고, 그렇게 이들은 교회를 떠난다. '너그러움'을 설파한 폴이 볼 때, 이들은 '너그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폴은 이들에게 결코 너그럽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너그러움을 위해 너그럽지 않은 사람에게 너그럽지 않아도 되는가? 이건 비단 연극 속 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였다. 필자는 고민의 영역을 사회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극을 보는 내내 사회운동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 전 활동가 출신의 한 정치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최근 젊은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사라지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현장과 운동 조직의 권위적인 문화에 젊은 활동가들이 회의를 느끼는 걸 많이 봤다고. 권위주의 타파를 외치는 활동가들조차 자신의 조직에서는 권위적인 지도부일 수 있다는 말이다.
미국의 페미니즘 활동가 나오미 울프(Naomi Wolf)가 "싸우는 과정 자체가 그 싸움을 통해 닮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라는 말을 남긴 이유도 목적과 수단의 모습이 다른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리라. 폴과 연극 속 교회가 우리 사회의 자회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