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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도 두려워했던 그녀... 숙종의 '센 엄마' 명성왕후

[TV 리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24.06.13 14:53최종업데이트24.06.1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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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1642-1684)'는 조선 18대 국왕 현종의 정비이자 19대 숙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대중들에게는 아들 숙종과 희대의 삼각관계로 유명한 며느리 인현왕후와 장희빈, 혹은 이름이 비슷한 후대의 명성황후(고종의 왕비) 등에 가려져서 인지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알고보면 명성왕후는 조선의 역대 왕비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한 성깔하는 카리스마를 갖춘 여장부로 유명했다. 일설에는 명성왕후의 등쌀에 못 이긴 국왕인 남편 현종이 강제로 '공처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아들 숙종의 다혈질적인 성격 역시 어머니에게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조선사에서 가장 유명한 악녀로 남게 되는 장희빈의 실체를 가장 먼저 간파하고 경계했던 인물도 바로 명성왕후였다.
 
명성왕후는 왜 그토록 극성스러운 인물이 되어야만 했고,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가 간절히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6월 12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12회에서는 '극성엄마 vs. 불도저 아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왜 장희빈을 내쫓았나'편을 통하여 명성왕후의 일대기와 그녀가 조선왕조에 미친 영향을 조명했다.
 
유일하게 '세자빈-왕비-대비' 루트 거친 명성왕후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명성왕후는 1642년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성왕후의 할아버지인 김육은 효종대에 영의정까지 지낸 명신이었다. 명성왕후의 가문인 청풍 김씨는 당시 조선에게 손꼽히는 명문가였고, 붕당으로는 서인(西人)에 속해있었다. 명성왕후는 정치적 후광까지 갖춘 탄탄한 집안 배경을 등에 업고 날 때부터 '금수저'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성왕후는 9살이던 1651년 시아버지 효종에게 간택되어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처음으로 입궁했고, 8년 뒤에는 남편 현종이 국왕에 즉위하며 중전이 됐다. 1661년에는 아들 숙종을 출산했다. 1674년에는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대비에 올랐고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에서 오직 명성왕후만이 보유하고 있는 특별한 타이틀이 있다. 바로 세자빈-왕비-대비 루트를 모두 거쳤다는 것. 이는 시아버지(효종)-남편(현종)-아들(숙종)의 3대가 모두 국왕이 되었다는 의미로써, 518년 27대에 이르는 조선 왕실 역사에서 명성왕후가 유일무이하다.
 
효종은 원래 후계자였던 형 소현세자의 의문사로 왕위를 물려받았고, 현종과 숙종은 모두 적장자 외아들로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다. 규칙과 질서를 무엇보다 중시하던 조선왕조에서 이처럼 탄탄한 '정통성'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명성왕후의 왕실 내 입지 역시 자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명성왕후는 어린 시절부터 정쟁과 암투가 판치는 궁궐 생활을 통하여 정치와 권력의 속성을 일찍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효종이 사망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과 남인간에 상례 격식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은,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왕실의 적장자 판단 여부)에 대한 초대형 정쟁이었다.

남편 현종은 예송논쟁을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명성왕후는 정치의 비정함과 위험성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때부터 명성왕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조건 기득권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15년이나 되는 재위기간 동안 왕비 명성왕후 외에 후궁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종의 아들은 명성왕후 사이에서 낳은 숙종이 유일했다. 국왕이 정비 외에 후궁을 두는 것은 단순히 여색을 밝히는 것만이 아니라 왕실의 후손을 낳는 임무와 관련되었기에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현종이 끝까지 후궁을 두지 못한 것은 아내 명성왕후의 철저한 단속 때문이었다. 명성왕후는 성정이 강하고 질투가 심하여 남편이 자신 말고 다른 여인을 두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명성왕후 입장에서는 후궁이 아이를 낳게 될 경우, 자신은 물론이고 배경이 되는 가문과 서인세력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까지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1674년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하면서 2차 예송논쟁이 벌어진다. 당시 집권세력은 서인은 1차 예송 당시 '효종은 차남이기 때문에 1년복'을 주장한 바 있고, 2차 때도 '인선왕후는 둘째 며느리이기에 9개월이면 충분하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현종은 서인이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하지 않고 차남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고, 이는 아버지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는 것이라며 크게 분노한다. 1차 예송이 서인 vs. 남인의 대립구도였다면, 2차는 서인 vs. 현종, 신군와 왕권의 대립구도로 바뀐 것이다. 가뜩이나 서인의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현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정권을 내치는 갑인환국(甲寅換局)을 단행한다.
 
당시 서인은 한당(漢黨)과 산당(山黨) 등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고, 현종이 몰아낸 세력들은 산당이었다. 명성왕후의 가문은 서인이었지만 비주류인 한당에 속해있었기에 숙청을 면했다. 오히려 명성왕후의 사촌오빠 김석주(金錫冑)는 서인임에도 남인들과 연계하여 서인 산당세력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이후 현종의 신임을 얻는 권신이 된다.
 
학계에서는 김석주가 현종의 의중을 그토록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데는, 배후에 명성왕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명성왕후는 늘 가까이서 남편 현종의 속내를 누구보다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의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도 강했다. 서인의 숙청이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서 김석주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가문도 보존하고 오히려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고 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명성왕후는 서인 산당 세력과 한동안 등을 지게 된다.
 
고집 센 숙종과 질 생각 없는 명성왕후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그런데 같은 해 현종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명성왕후는 뜻하지 않은 역풍을 맞게 된다. 후계자인 아들 숙종은 당시 아직 14세의 어린 나이였다. 관례대로라면 왕대비가 된 명성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명성왕후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서인 산당세력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친정을 시작했다.
 
숙종은 어머니 명성왕후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아 어린 나이임에도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센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아버지 현종에 이은 적장자 출신 국왕이라는 확고한 정통성은 노회한 신하와 당파들도 감히 숙종의 권위를 우습게 볼 수 없었던 원동력이었다.

수렴청정은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명성왕후는 그저 아들의 뒤에서 물러나 정치를 관망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숙종 즉위 초기, 삼복의 변(三福의 變)이 발생한다. 인조의 후손이자 숙종에게 오촌 당숙이 되는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의 왕족 삼형제가 궁녀와 간통하여 임신까지 시켰다는 충격적인 스캔들이 벌어진 것.
 
이 사건을 폭로한 것은 숙종의 외조부이자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이었다. 사실 명성왕후는 평소 삼복 형제가 숙종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들이 장차 숙종의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했다. 하지만 숙종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보니 처음에는 근거없는 모함이 아니냐며 처벌을 거부했고, 오히려 할아버지인 김우명을 무고죄로 투옥하기까지 했다.
 
이에 명성왕후는 갑자기 국왕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정청에 예고없이 난입하더니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목격한 궁녀 간통 사건의 전말을 폭로한다. 명성왕후는 복창군 형제가 인선왕후의 상중에 입궁하여 궁녀들을 희롱하고 동침했으며, 심지어 남편 현종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복창군 형제에게 화가 될까봐 덮어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명성왕후는 "주상(숙종)이 어찌 내간(내명부)의 일을 아시겠는가"라고 호소하며 "복창군 형제에게 베푼 남편(현종)의 선의가 아버지(김우명)의 죄로 돌아온 것이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결국 명성왕후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왕대비가 눈물까지 흘리며 적나라한 전후사정을 고변하는 상황에서, 감히 이를 반박하거나 의심을 품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부담스러워진 숙종은 입장을 번복하여 삼복 형제를 유배보냈고 김우명 역시 석방한다.
 
수렴청정을 하지 않은 왕대비가 이렇게까지 정치에 개입한 것은 조선 역사에서도 대단히 드문 사례였다. 왕실의 법도를 어기는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끝에, 결국 판을 뒤집은 명성왕후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또한 선을 넘은 명성왕후의 행동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해명인 동시에 자신과 대립하던 아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명성왕후의 독단적인 행동은, 당시 숙종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했던 남인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숙종 역시 어머니 때문에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놓였다. 여기에 사면된 이후에도 거듭된 남인의 공격에 시달리던 김우명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이에 명성왕후는 3일 후 언문교지를 내려 이번엔 '자살소동'을 벌인다. <숙종실록>에는 "살아서 쓸모가 없고 죽어야 할 사람이 이제까지 살아있는 것이 고통스럽다. 정신이 혼미하여 오직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서 죽기를 청하였다"로 기록되어 있다. 명성왕후의 이러한 돌발행동은 진심이라기보다는, 자신과 대립하는 아들과 남인에게 보내는 협박이자 항의의 퍼포먼스였다.
 
조선 조정의 실세였던 명성왕후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숙종은 비록 '극성엄마'인 명성왕후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러야했지만, 한편으로는 명성왕후의 성격과 정치감각을 그대로 빼닮기도 했다. 온화한 성격에 평화적으로 정쟁을 해결하려 했던 아버지 현종과는 달리, 숙종의 변덕스럽고 다혈질적이며 때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과 정치스타일은 확실히 명성왕후에 더 가깝다. 숙종으로서는 어머니가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벌어지면서 숙종이 남인세력을 축출하고 삼복 형제 역시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처형된다. 결국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돌고돌아 명성왕후가 원하는 결말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명성왕후는 서인 산당의 거두였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정계 복귀를 권유한다. 대비의 신분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당시 정계의 최대 거물이었던 송시열을 포섭했다는 것은, 명성왕후가 조선 조정의 실세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송시열 역시 이를 수락하며 명성왕후를 여중요순(女中堯舜)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요순황제는 중국에서 성군의 대명사로 칭송받는 인물들이고, 명성왕후가 여성임에도 이들에 비견할 만한 걸물이라고 극찬한 것이다. 예송논쟁 이후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명성왕후의 가문과 서인 산당이 다시 정치적 연대를 회복한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처럼 천하를 쥐락펴락하던 여걸 명성왕후도,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장희빈(張禧嬪, 본명 장옥정)의 존재였다. 그녀는 삼복형제의 심복이었던 장현이라는 인물의 5촌 조카로 궁궐에 들어와 궁녀로 일하고 있었고, 정치적 계파로는 명성왕후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인 계열에 가까웠다. 젊은 숙종은 이러한 장희빈을 총애했고 깊은 사랑에 빠졌다.
 
여자가 여자를 알아본다는 이야기처럼, 명성왕후는 일찍이 장희빈의 위험성을 가장 먼저 간파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장희빈을 가리켜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다.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라며 우려했다고 한다.
 
명성왕후가 장희빈을 경계했던 또다른 이유는, 당시 숙종이 정비였던 인현왕후 사이에서 아직 후사가 없었고, 만일 장희빈이 아들이라도 먼저 낳게 되면 이를 발판하여 남인이 다시 득세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명성왕후는 당시 궁녀였던 장희빈을 출궁시켜 민가로 내쫓았다. 인현왕후가 왕의 승은을 입은 장희빈을 불러들이고자 설득했을 때도, 명성왕후는 장희빈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끝까지 반대했다.
 
1683년 10월,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명성왕후는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한겨울에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며 간절히 쾌유를 기도한다. 다행히 숙종은 얼마 후 건강을 되찾았지만, 이번엔 명성왕후가 병석에 눕게된다. 1684년 1월 11일, 평생 아들만 바라보며 살았던 명성왕후는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국조보감>에 따르면, 숙종은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누구인들 어머니가 없겠으며 어느 어머니인들 모정이 없겠습니까만은, 지극한 모자의 정과 사랑이 그 누가 우리만한 이가 있겠습니까"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명성왕후의 불안한 예감은 사후에 현실이 되고 만다. 숙종은 명성왕후의 삼년상을 마치자마자, 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했던 장희빈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조선왕실의 역사는, 명성왕후의 예언처럼 환국과 스캔들이 속출하는 피바람의 시간들이 이어지게 된다.
 
명성왕후는 평생 아들 숙종의 왕권과 삶이 자신보다도 중요했던 인물이었다. 누구보다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했지만 그 안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꼭 이루고야마는 집착과 독선적인 성격마저도 그대로 물려준 탓에, 아들 숙종과 그 후손들의 성향 및 정치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 또한 명성왕후가 남긴 짙은 그늘이었다.
벌거벗은한국사 명성왕후 숙종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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