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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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는 1642년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성왕후의 할아버지인 김육은 효종대에 영의정까지 지낸 명신이었다. 명성왕후의 가문인 청풍 김씨는 당시 조선에게 손꼽히는 명문가였고, 붕당으로는 서인(西人)에 속해있었다. 명성왕후는 정치적 후광까지 갖춘 탄탄한 집안 배경을 등에 업고 날 때부터 '금수저'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성왕후는 9살이던 1651년 시아버지 효종에게 간택되어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처음으로 입궁했고, 8년 뒤에는 남편 현종이 국왕에 즉위하며 중전이 됐다. 1661년에는 아들 숙종을 출산했다. 1674년에는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대비에 올랐고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에서 오직 명성왕후만이 보유하고 있는 특별한 타이틀이 있다. 바로 세자빈-왕비-대비 루트를 모두 거쳤다는 것. 이는 시아버지(효종)-남편(현종)-아들(숙종)의 3대가 모두 국왕이 되었다는 의미로써, 518년 27대에 이르는 조선 왕실 역사에서 명성왕후가 유일무이하다.
효종은 원래 후계자였던 형 소현세자의 의문사로 왕위를 물려받았고, 현종과 숙종은 모두 적장자 외아들로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다. 규칙과 질서를 무엇보다 중시하던 조선왕조에서 이처럼 탄탄한 '정통성'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명성왕후의 왕실 내 입지 역시 자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명성왕후는 어린 시절부터 정쟁과 암투가 판치는 궁궐 생활을 통하여 정치와 권력의 속성을 일찍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효종이 사망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과 남인간에 상례 격식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은,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왕실의 적장자 판단 여부)에 대한 초대형 정쟁이었다.
남편 현종은 예송논쟁을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명성왕후는 정치의 비정함과 위험성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때부터 명성왕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조건 기득권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15년이나 되는 재위기간 동안 왕비 명성왕후 외에 후궁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종의 아들은 명성왕후 사이에서 낳은 숙종이 유일했다. 국왕이 정비 외에 후궁을 두는 것은 단순히 여색을 밝히는 것만이 아니라 왕실의 후손을 낳는 임무와 관련되었기에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현종이 끝까지 후궁을 두지 못한 것은 아내 명성왕후의 철저한 단속 때문이었다. 명성왕후는 성정이 강하고 질투가 심하여 남편이 자신 말고 다른 여인을 두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명성왕후 입장에서는 후궁이 아이를 낳게 될 경우, 자신은 물론이고 배경이 되는 가문과 서인세력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까지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1674년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하면서 2차 예송논쟁이 벌어진다. 당시 집권세력은 서인은 1차 예송 당시 '효종은 차남이기 때문에 1년복'을 주장한 바 있고, 2차 때도 '인선왕후는 둘째 며느리이기에 9개월이면 충분하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현종은 서인이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하지 않고 차남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고, 이는 아버지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는 것이라며 크게 분노한다. 1차 예송이 서인 vs. 남인의 대립구도였다면, 2차는 서인 vs. 현종, 신군와 왕권의 대립구도로 바뀐 것이다. 가뜩이나 서인의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현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정권을 내치는 갑인환국(甲寅換局)을 단행한다.
당시 서인은 한당(漢黨)과 산당(山黨) 등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고, 현종이 몰아낸 세력들은 산당이었다. 명성왕후의 가문은 서인이었지만 비주류인 한당에 속해있었기에 숙청을 면했다. 오히려 명성왕후의 사촌오빠 김석주(金錫冑)는 서인임에도 남인들과 연계하여 서인 산당세력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이후 현종의 신임을 얻는 권신이 된다.
학계에서는 김석주가 현종의 의중을 그토록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데는, 배후에 명성왕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명성왕후는 늘 가까이서 남편 현종의 속내를 누구보다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의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도 강했다. 서인의 숙청이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서 김석주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가문도 보존하고 오히려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고 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명성왕후는 서인 산당 세력과 한동안 등을 지게 된다.
고집 센 숙종과 질 생각 없는 명성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