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팅 보드 공연장에 있던 6월 7일 출연진.
편성준
뾰족 지붕과 계단이 돋보이는 저택이 무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뒤 극이 시작되면 거의 모든 배우들이 한꺼번에 등장해 뺨에 마이크를 붙이고 빠르게 대사를 쏟아낼 땐 좀 정신이 없다. 대극장의 공간감을 느끼게 해주는 배우들의 육성 대신 마이크를 통해 들리는 대사들은 원작의 고전미를 제거하고 흡사 외국 드라마 더빙판을 보는 느낌마저 준다. 사이먼 스톤이 그려내는 '벚꽃동산'의 낯섦은 여기부터 시작이다.
하지만 이런 황당함은 20분만 지나도 사라진다. 그리고 충분한 보상이 있다. 바로 뉴욕에서 바로 산 듯한 고급 트레이닝복 위에 크림색 버버리코트를 입고 나타난 전도연의 등장이다.
전도연과 박해수 등 거물급 캐스팅으로 일대 화제를 몰고 온 사이먼 스톤의 연극 <벚꽃동산>을 8일 토요일 오후 3시 공연으로 보았다.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 LG아트센터의 공연계획표만 보고 아내가 티켓을 구매해 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출자인 사이먼 스톤은 1903년에 안톤 체홉이 러시아에서 쓴 극본을 2024년 한국에 맞게 뜯어고치고 이름도 전부 한국식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라네프스카야와 가예프는 송도영·송재영 남매가 되었고 로파힌은 황두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배우들은 체홉이 창조한 캐릭터의 개성과 방향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기에 '벚꽃동산'이 가진 생명력은 여전하다. 리뷰를 쓰기 전 노트에 원작 인물들과 LG아트센터에 선 배우들을 대조해서 메모해 보았다. 나이 든 하인 피르스와 독일 출신 가정교사 샤를로타가 사라졌고 늘 빚에 시달리던 이웃 페치치크는 친척 아저씨 김영호로 살짝 바뀌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무대를 휩쓸고 넷플릭스에서 만든 영화로도 유명한 사이먼 스톤은 왜 한국에 와서 '2024년판 벚꽃동산'을 만드는 모험을 감행했을까.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열여덟 살 때부터는 2년 이상 같은 나라에서 산 적이 없다는 그는 수많은 고전을 섭렵했고 클래식한 작품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담기엔 체홉의 '벚꽃동산' 밖에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메릴 스트립' 같은 배우가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당연히 그 배우는 전도연이어야 했다. 러브콜을 받은 전도연은 원캐스팅의 배역이 부담스러워 "어떻게 해야 성의 있게 거절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국립극장에서 사이먼 스톤의 <메디아>를 영상으로 본 뒤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는 박해수, 손상규, 최희서, 남윤호, 유병훈, 박유림 등 나머지 배우 아홉 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체홉의 연극엔 버릴 인물이 하나도 없다'라는 말처럼 각자 맡은 배역을 최고의 기량과 성의로 완성해 냈다. 박해수는 큰 체격과 잘생긴 얼굴 말고도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손상규와 남윤호는 호흡도 긴 그 대사들을 어찌 그리 잘 소화해 내는지. 유병훈은 페치치크와 피르스 역까지 맡아 최고의 유머를 보여주고, 이지혜는 여전히 귀여우면서도 노련한 포스를 뽐내고, 박유림은 '어디서 봤더라' 했는데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수화로 연기를 하던 바로 그 배우였다.
아, 연극을 보면서 정상급 밴드의 콘서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콘서트를 보면 중간에 악기 연주자들마다 '솔로 퍼포먼스'를 하지 않나. 이번 연극의 배우들이 연기할 때마다 그랬다. 열 명 모두의 연기가 특별하게 다 좋은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들을 따라 기립박수를 치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