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스틸컷
CJ ENM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첫 작품의 막을 올린다. 17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아 역대 한국영화 흥행순위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명량>이 바로 그 영화다. <명량>은 백의종군 뒤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받아든 이순신의 이야기다. 임진년 대승 뒤 부산 공략을 위하여 애써 모은 300척의 대함대가 모조리 수장된 뒤다. 어디 함대뿐이었으랴. 그가 길러낸 장수며 정예 병사가 대부분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수군도, 병졸도 없는 수군통제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그러나 이순신은 주저앉지 않는다.
임지로 가는 길을 길게 늘여가며 하동부터 구례, 곡성, 순천, 보성 등지를 돌아 싸울 장정을 모집한다. 칠천량 대패에 휩쓸리지 않고 무단 탈주한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도 수습한다.
이때 선조가 또 한 번 오판을 내려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조서를 내리지만, 이순신은 저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는 장계를 올린다. 백의종군 뒤 다시 한 번 왕명에 반하는 장계를 올린 그는 그가 아니었다면 반드시 패했을 명량 울돌목으로 나선다. 최소 330척, 최대 500척에 이르는 대규모 왜 수군을 아군 함선 13척(장계 이후 한 척 보강)으로 맞선 전설의 전투다.
정유년 재침해온 대규모 왜 수군을 연전연패하며 사기가 꺾일 대로 꺾여 있는 조선수군이 맞이한다. 한눈에도 절대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순신(최민식 분)은 대장선에 타고 전장 가운데서 분투한다. 영화 속엔 신기에 가까운 전략전술도, 신화적인 용맹도 없다. 피칠갑을 한 채 적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무장과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눈앞의 적을 베는 병사들, 그들의 승리를 소망하는 백성들이 있을 뿐이다. 대장선 뒤 저 멀리엔 장군을 나몰라라 하고 떠 있는 12척의 전함이, 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장수와 병사들이 있다. <명량>이 그리는 건 전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전장이다. 이순신이 마주했던 절망의 언덕이다.
479년 전 오늘, 이 땅에 천운이 내렸다
▲명량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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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다 여겼던 싸움이다. 왜도, 심지어는 조선 장수들조차 조선의 패배가 기정사실이라 여겼다. 그 치밀한 이순신이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 밖에 꺼낼 수가 없었던 전투였다. 그 절망의 언덕에서 어떻게 희망을 구하였는가, 그것이 <명량>의 관심이다.
영화는 그 답이 이순신의 특출난 리더십, 또 민중들이 모아 비춰낸 귀한 마음에 있다고 말한다. 짙게 드리운 두려움을 한 줌의 용기로 변화시키고 그 작은 용기를 키워내 국면을 단박에 전환시킨 이순신의 리더십이 영화 내내 홀로 빛난다. 감독은 장수들이 저 멀리 물러난 가운데 절벽 위에 올라 한 마음으로 승리를 기원하던 백성들의 귀한 마음 또한 기적적 승리에 한 몫을 담당한 것으로 그려낸다. 명량의 회오리바다와 대장선의 위험을 알린 백성들의 몸짓 가운데, 무엇이 더 천운이었느냐 묻던 이순신 장군의 물음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그 끝을 맺는다. 천운이 따라 이길 수 있었던 승리, 무엇이 더 천운이었나.
명량해전으로부터 427년이 흐른 오늘이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 영화의 마지막 질문에 나는 확실히 답할 수 있다. 가장 큰 천운은 이순신이란 인물의 존재다. 그가 아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다시 쓰일 밖에 없었을 테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두 차례 전쟁에서 제해권을 얻지 못하였다면, 또 선조의 명에 따라 수군을 해체했다면, 명량으로 나아가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 전쟁에서 다른 12척처럼 물러났다면, 그랬다면 조선은 바다를 지키지 못했을 테다. 전라도를 지키지 못했을 테다. 조선은 고립돼 짓밟히고 명은 후퇴해 새로 전선을 짜고 마침내 한반도는 왜의 땅으로 전락했을 테다. 그래서 이순신은 천운이었다. 오늘의 우리가 기꺼이 기념할 영웅이었다.
479년 전 오늘인 1545년 4월 28일, 이순신이 이 땅에 났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천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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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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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년 전 오늘, 이 땅에 천운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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