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팽> 포스터
국립극단
공중파 방송사의 개그맨 면접시험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방, 아무것도 없는 흰 벽 앞에 개그맨 지망생이 혼자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웃지 않으려고 결심한 심사위원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웃겨 봐." 나 같으면 긴장해서 그대로 쓰러졌을 것 같은 상황인데 그는 신이 나서 사람들을 웃기기 시작했다. 개그맨이 된 사람들은 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사람들이다. 그때부터 나는 희극인들을 존경하기로 했다. 남을 웃기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극하는 사람들은 희극과 비극 중 어떤 게 더 어려울까? 나는 단연 희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립극단의 유일무이한 희극 레퍼토리인 <스카팽>을 놓칠 수 없었다.
17세기에 태어난 주인공 스카팽은 천한 하인 신분이지만 머리가 좋고 꾀가 많아서 아르강뜨와 제롱뜨 같은 재벌들에게 신뢰를 받는 인물이다(몰리에르가 쓴 원작의 제목은 <스카팽의 간계>다). 그런데 스카팽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다. 아르강뜨의 아들 옥따브와 제롱뜨의 아들 레앙드르도 위기가 닥치자 급하게 스카팽부터 찾는다. 자신들은 이미 좋아하는 짝이 있는데 부모들이 결탁해 억지로 사돈을 맺으려 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스카팽의 대 활약이 시작된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프랑스엔 몰리에르가 있다. 그는 1600년대에 이런 멋진 희극을 쓰고 극단을 이끌고 다니며 공연을 한 희극의 대가였다.
연극이 시작되면 이 작품을 쓴 극작가 몰리에르가 직접 오른쪽 무대 구석에 등장하는데 몰리에르 역을 맡은 성원 배우의 원맨쇼가 장난 아니다. 어떻게 저렇게 길고 빠른 대사를 다 외우고 소화해 랩까지 하면서 관객들을 쥐었다 놓았다 할까 감탄하게 한다. 몰리에르는 말한다. "유럽 극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 통한다고? 에이, 벌써 한국에서 네 번째 시즌 공연인데?" 몰리에르는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극에 개입해 너스레를 떨다가 배우들이 장면을 이어가야 할 때면 "연결해"라는 대사를 내뱉고 사라지는데 이는 "도대체 군함에 왜 탔어?"와 함께 이 연극의 유행어가 되었다(나와 아내는 두 번째 관람이다). 군함 얘기는 스카팽이 제롱뜨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당신 아들 레앙드르가 바닷가로 산책 나가 군함에 잠깐 탔는데 그만 이집트로 납치되었다"라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아들의 몸값을 내놓기 아까운 수전노 제롱뜨가 몸을 배배 꼬며 "도대체 군함에 왜 탔어?!"라고 소리 지를 때마다 객석이 웃음바다가 된다.
관객들은 옥따브와 그 친구들, 그리고 아이쌍뜨 등 등장인물들이 선보이는 우스꽝스러운 신체언어들과 과장된 분장, 그리고 삐죽빼죽한 헤어스타일에 몸을 맡기며 박수를 치고 웃는다. 배우들은 노래하고 춤 주는 중간중간 윤석열이나 한동훈 같은 정치인이나 도올 선생 등 유명인의 성대모사를 하고 호주 대사 임명 사건 등 시사 문제를 비틀어 대사에 집어넣기도 한다. 한 배우가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를 너무 멋지게 열창해 박수를 받으면 다른 배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이게 박수받을 일인가요?"라고 화를 내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