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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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의 치명적 단점
하지만 임사홍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다. 자신의 뜻과 맞지않는 사람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본인의 능력과 탄탄한 집안배경이 주는 자신감, 여기에 마침 남을 비판해야하는 언관이라는 지위까지 더해지며 임사홍은 모두까기 인형처럼 여기저기에 적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표적인 일화로 <성종실록>에는 임사홍이 최한정이라는 관리에 대하여 '나이가 50이 넘고 본래의 학문이 없으니, 제 비록 이업(학문을 익힘)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라고 혹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임사홍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나이가 두 배 가까이 차이나는 아버지뻘 선배 관료에게 나이도 많고 학문도 부족하니 쓸모없는 인물이라며 비판을 넘어선 인신공격성 막말을 한 것이다. 새파란 후배에게 공개 비난을 받은 최한정은 충격을 받아 사직을 청했다.
심지어 임사홍의 안하무인 행태는 국왕인 성종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1476년 성종이 친정을 시작한 첫 해 단오제날, 성종은 풍작을 기원하며 조상의 위패에 제사를 올렸는데 당시 국가행사를 담당하는 직책인 예방승지였던 임사홍이 선왕(예종)의 영전에 첫 술잔을 올려야하는 임무를 까먹는 실수를 저질렀다. 왕실의 국가적 행사인데다 유교 국가로 제사를 중시했던 조선에서는 큰 죄가 될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성종은 이에 불편함을 드러내며 임사홍을 에둘러 질책했지만 크게 문제삼지는 않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듯했다.
주변의 신료들은 임사홍에게 이 사건을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말고 성종에게 정식으로 사죄하여 노여움을 풀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임사홍의 대답이 걸작인데 "이미 질책을 받았는데 또다시 벌을 청할 필요가 있습니까?"였다고.
상상을 초월하는 거만한 대답에 경악한 신료들은, 임사홍이 끝내 거부한다면 모두가 나서서 임금에게 처벌을 요청하겠다고 압박했다. 그러자 임사홍도 마지못해 성종에게 나아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성종 입장에서도 종친의 사위이자 선왕의 사돈인 임사홍을 가볍게 홀대할 수 없어 속내야 어찌됐든 오만방자한 태도를 눈감아준 측면이 있었다.
임사홍은 이후로도 성종 시대에 꾸준히 요직을 역임했고 특유의 소신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1477년, 성종과 불화를 겪던 중전 폐비 윤씨가 폐위될 위기에 처하자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임사홍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왕실에 미칠 후유증을 우려하여 세자(훗날의 연산군)의 친모인 윤씨의 폐위를 반대하는 분위기였던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선 인물중 하나가 임사홍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왕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소신을 굽히지않는 임사홍의 모습이,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간신의 이미지와는 상반된다는 점이다.
당시 윤씨는 임사홍과 신하들의 반대로 첫 번째 위기를 넘겼으나 2년뒤인 1479년 결국 폐위당했고, 1482년에는 사약을 받고 사사당한다. 하지만 폐비 윤씨를 옹호했던 이 사건은 훗날 연산군 시대가 되어 임사홍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또한 임사홍이 도승지로 근무하던 시절, 조선 일대에 흙비가 내리는 기상 이변이 발생한다. 당시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조선 시대에는 천재지변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젊은 언관들은 왕이 국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탓이라고 주장하며 성종을 비판했다.
하지만 임사홍은 흙비도 자연현상의 일부일뿐이라고 합리적인 주장을 펼치며 이번엔 성종을 엄호했다. 다만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권력욕이 컸던 임사홍이 젊은 언관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견제하려고 했던 의도로 잠시 성종의 편에 섰을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결국 조정에서 골고루 미운털이 박힌 임사홍은 '소인(小人,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이라는 칭호로 불리면서 공공의 적으로 전락했다. 군자(君子)와 대비되는 의미로서 소인은, 유교국가인 조선 사회에서 선비가 들을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었던 만큼 임사홍에 대한 당시 정계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종은 그런 임사홍을 줄곧 비호해왔으나 1478년 '붕당조성죄'가 적발되면서 임사홍은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된다. 임사홍이 가까운 언관들에게 사주하여 성종의 총애를 받던 현석규라는 인물을 모함해서 탄핵시키려고 했던 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이번에는 성종도 크게 분노하여 임사홍을 삭탈관직하고 평안도 의주로 유배를 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성종이 임사홍에게 내린 처분은 사실 죄목에 비하면 매우 관대한 것이었다. 조선의 법률상 붕당을 조성한 혐의는 사형을 받아야할 중죄였다. 조정에서도 임사홍을 사사하라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성종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종은 이후 몇차례 임사홍을 사면하여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려고 했으니 그때마다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20대의 청년이었던 임사홍은 어느덧 50을 바라보는 중장년이 될 때까지 야인으로 머물며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연산군이 보위에 오른다. 연산군 역시 즉위 초기에 임사홍을 복권시키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임사홍은 받았던 품계를 도로 회수당하는 또 한번의 치욕을 겪어야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정계에서 배척당하는 상황을 겪으며 임사홍의 원한도 점점 깊어졌다.
이에 임사홍의 4남 임숭재는 아버지를 구명하는 상소를 올리며 복권을 호소했다. 임숭재는 성종의 딸이자 연산군의 누이인 휘숙옹주와 결혼하여 왕가의 사위가 되었으며, 연산군과는 처남-매부 관계를 넘어 사적으로도 절친한 사이였다. 이로서 임사홍은 무려 25년만에 정계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을 절치부심했던 임사홍의 복수는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의 피바람을 몰고온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들로부터 중상모략을 받아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에 분노한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과 그 자식들까지 때려죽이고, 윤씨의 폐위에 동조하거나 방관한 조정 신료들까지 대거 학살했다. 갑자사화 당시 죽거나 유배된 이들만 무려 200여명에 이르렀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임사홍은 갑자사화 이후 자신을 비난하던 이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반드시 앙갚음을 했다고 한다. 임사홍의 아내(효령대군의 손녀)와 두 며느리(현숙공주, 휘숙옹주)가 모두 왕실의 일원이었고 그만큼 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내밀한 이야기까지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임사홍으로서는 폐비 윤씨 사건을 바탕으로 연산군의 신임을 얻으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계산이 있었다. 또한 절대왕권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연산군 역시 반대파 탄압과 제거의 명분으로 윤씨 사건과 임사홍을 활용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임사홍에게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온다. 그의 차남인 임희재가 진시황에 빗대어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쓴 것이 적발된 것. 분노한 연산군은 임희재의 몸을 네 갈래로 찢어죽이는 능지처사를 명했다.
<해동야언>에는 연산군이 임희재를 죽이기 전에 임사홍을 불러 사실을 추궁하자 '소인의 아들은 원래부터 성품과 행실이 불순했다'고 비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아들에 대한 구명조차 포기한 임사홍의 냉혈한 면모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심지어 공식 실록에는 임사홍은 아들이 처형되던 날에도 지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다만 학계에서는 임희재의 처형은 이미 피할 수 없던 상황에서 임사홍으로서는 자신과 가문만이라도 지키기 위하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연산군은 임희재의 처형날에 임사홍의 동태를 감시하 했고, 임사홍은 일부러 연회를 열어 태연한 모습으로 연산군의 의심을 피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사홍은 임희재의 사후에도 변함없이 연산군의 측근으로 중용되며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성종 시절에 국왕을 상대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젊은 날의 도도한 임사홍은 더 이상 없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이 사냥을 나가는 지역마다 민가를 강제로 허물고 금표를 설치하는 일을 주관하여 수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또한 임사홍은 아들 임숭재와 함께 전국의 미녀들을 징발하여 연산군의 유흥을 위하여 바치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대상은 기생에서 백성의 딸, 심지어 사대부가의 유부녀를 가리지 않았고, 그 숫자는 최대 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바로 2015년 민규동 감독이 연출한 <간신>이다.
영화와 달리 실제 역사에서 임숭재는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1년전 병을 얻어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간신이었던 임숭재는 심지어 유언에서도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전하께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만이 한이다" 라는 글을 연산군에게 남겼다고 한다. 훗날 중종실록에서는 임사홍을 큰 소인, 아들 임숭재를 작은 소인이라고 칭하여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간신)'이라는 역대급 혹평을 남기기도 했다.
임사홍 타락의 진짜 이유
임사홍은 왜 이렇게까지 타락해야만 했을까. 조정에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었던 임사홍에게는 왕의 신임만이 권력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또한 연산군의 총애를 누렸던 이들은 임사홍만이 아니었고, 임사홍은 다른 간신들과의 충성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더욱 필사적으로 연산군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연산군은 임사홍의 치아 사이가 넓은 것을 보고 활치옹(豁齒翁)'이라는 애칭까지 붙여주며 총애했다고 한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임사홍의 권력에도 최후의 날이 찾아왔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나며 임사홍은 자택에서 반정군의 습격을 받아 즉결처형당한다. 연산군의 수족으로 온갖 전횡을 일삼던 임사홍은 처음부터 반정군의 처형 대상 1순위였다. 절치부심의 세월 끝에 마침내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가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린 시간은 약 3년에 불과했다. 반정 20여일 뒤에는 이미 죽은 시신이 재차 부관참시되는 굴욕도 겪었다.
임사홍은 사후에도 성종과 연산군 시절의 행적을 말미암아 간신과 소인의 대명사로 전락하여 오랫동안 지탄을 받아왔다. 그런데 현대의 학계 일각에서는 임사홍의 악행을 인정하면서도 주동자는 어디까지나 연산군이었고, 임사홍 역시 연산군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된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희대의 간신이라는 평가 역시 연산군을 폐위시킨 반정세력들이나 야사의 기록에 치우쳐있기에 온전히 신뢰할수도 없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주변과 화합하지 못하고 오만한 성격과 권력에 대한 집착 때문에 끝내 타락하여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결말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을 향한 복수를 노리고 휘두른 칼날은, 결국 임사홍 자신에게 돌아와 본인은 물론이고 자식들의 인생과 가문마저 무너뜨리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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