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任士洪, 1445-1601)은 조선 전기의 권신으로 세조부터 연산군까지 무려 4대에 걸쳐 활약했으며, 중종반정으로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당대에 그는 연산군의 폭정을 배후에서 부채질한 흑막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오랫동안 나라를 망친 간신(奸臣)의 대명사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임사홍이 사실 능력은 출중한 인물이었고,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는지도 의문스럽다는 반론이 일각에서 제기되며 활발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과연 임사홍은 정말 희대의 간신이었을까, 아니면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쓴 희생양이었을까.
1월 3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89회에서는 '조선 최고 폭군의 탄생비화, 연산군은 왜 간신 임사홍의 한 마디에 미쳐버렸나'편을 통하여 임사홍의 문제적 일대기를 조명했다.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당시만 해도 한미하던 풍천 임씨 가문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또한 그 아들 임사홍은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손녀사위로 낙점받으며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다. 효령대군 또한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우대를 받고 있던 종친 가문이었다. 임사홍은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음서제로 관직에 출사했으나, 이에 만족하지않고 불과 17세의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여 당당히 3등으로 합격하며 자력으로 본인의 능력을 입증했다.
임사홍은 이후 세조와 예종을 거쳐 9대 왕 성종이 즉위하자 22세의 나이에 경연관에 선정되어 어린 임금을 가르치는 스승이 됐다. 7년뒤 성종이 장성하여 친정을 시작할 무렵에는 언관으로 재직하며 국정에 대한 의견을 내고 왕과 신하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역할을 맡았다.
성종은 당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조정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언관의 영향력을 키웠다. 이처럼 20대의 임사홍은 젊은 나이에 여러 요직을 거치며 미래의 고위직으로 가는 지름길에 올랐던 촉망받는 젊은 엘리트 관료였다.
또한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국혼하며 2대에 걸쳐 왕가와 인연을 맺게된다.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손녀사위에서 선왕 예종의 사돈으로 위상이 또 한번 높아졌다.
당시만 해도 임씨 가문이 아직 그 정도로 유력한 명문가는 아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임사홍보다는 왕실의 핏줄이었던 아내의 영향력이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사홍은 본인의 탁월한 능력과 더불어 왕실과 가까웠던 집안배경을 바탕으로 순탄하게 출세길을 걸을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