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인> 스틸컷
영화사 진진
03.
일반적으로 영화의 사건이라는 것이 인물들 사이의 대립을 강화시키고 직접적인 극의 동력이 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의 사건은 관계를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로만 작용한다. 기홍의 작업 차량에 일어난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영화가 인물의 면면을 소개하는 볼륨에 비해 너무 사소하고 보잘것없다. 이 사고로 영화가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기홍을 중심으로 한 관계다. 여기에는 기존에 존재하던 관계가 해체되는 것,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 그리고 얕게 존재하던 관계가 두터워지는 것 등의 모든 양상이 포함된다.
가령, 이 사건으로 인해 피아노 학원 원장인 아영과의 관계는 완전히 해체된다. 범인이 피아노 학원의 창문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당일 저녁 술을 마신 기홍과 경준(최경준 분)이 그녀의 허락도 없이 학원 문을 열고 무단 침입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 다시 피아노 학원을 찾은 기홍과 정환(안주민 분)이 재차 무단 침입을 한 행동 역시 함께다. 반면 함께 범인을 쫓는 정환과의 관계는 두터워지는 쪽에 속한다. 사실 범인을 찾으러 가자는 제안 역시 직접적인 피해자인 기홍이 아닌 정환의 쪽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식으로 영화의 중심 사건처럼 보이던 차량 문제는 기홍을 중심으로 한 인물 관계를 완성하는 정도의 동력만을 제공한 뒤에 자신의 역할을 인물들 사이의 관계로 그 힘을 넘긴 뒤에 이탈한다. 지금까지 영화를 이끌어가던 유일한 힘이자 궁금증이었던 사건의 숨겨진 부분을 빠른 시점에서 영화 스스로 밝히면서다(범인의 존재는 함께 밝혀지지 않지만 영화의 중후반부를 지나며 이 지점 역시 완벽히 해소된다). 이 순간부터 영화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인물들의 행위는 그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뿐, 영화를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에너지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감독이 왜 처음부터 인물을 표현하고 그를 형성하고 있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04.
영화가 중후반부를 지나면서 기홍을 중심으로 한 관계에 대해 깊이 이야기 시작할 때 핵심이 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와 상황에 따라 또 해당 인물이 어느 집단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행동과 태도가 달라지는데, 이는 처음에 이야기했던 그의 여러 면모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조금 더 보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누구에게나 양면의 모습이 존재할 수 있고 다른 모양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집단 속에서 어떤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느냐에 따라, 어떤 심리로 대상을 마주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말이다.
"아 무슨 얘기, 그냥 잘 지내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관계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쓰였던 것은 가족 안에 존재하는 기홍의 모습이었다. 이 영화에서 기홍의 가족이 등장하는 장면은 가장 짧은 관계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학원 원장인 아영과 함께 나오는 장면보다 더 짧다) 가장 가까운 대상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딱딱하다. 그 사이 경준과의 실랑이가 일어나는 장면이 놓여 있기는 하지만 그 만남조차 자주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부분을 고려하면 다른 핑계를 대기는 어렵다. 하지만 집주인이자 최근 가장 친하게 지내는 정환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어떤가? 낮술을 같이 하자는 제안과 오밤중에 피아노 학원을 가자는 말, 뜬금없이 테니스를 같이 치자는 권유까지 싫은 내색을 표하면서도 그의 모든 요청을 받아들이는 기홍이다.
인물에 대한 이와 같은 표현은 기홍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정환은 얼굴도 한번 본 적 없고,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문제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이기쁨 분)는 궁금해하고 만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내인 현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는 현정 또한 마찬가지. 사랑할 자신은 없지만 좋은 아내는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정환의 결혼 제안을 승낙했다는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집에 세를 들어와 살고 있는 기홍에게 더 마음을 여는 듯한 모습으로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물론 이 작품에서 인물들에 대한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은 그 위에 가치 판단의 기준이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또한 '괴인'처럼 보이는 기홍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불편하거나 격앙되어 있지 않다고 했던 부분과 그 궤를 함께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