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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뉴욕 영화광의 성지를 추적하다 알게 된 사실

[김성호의 씨네만세 556] <킴스 비디오>

23.10.04 14:18최종업데이트23.10.2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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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네아스트(영화 작가를 이르는 말) 중 하나가 장 뤽 고다르다. 영화 그 자체를 사랑했던 고다르는 필생의 작업인 <영화사>를 통하여 영화와 인간, 저 자신의 관계를 정리하려 든다. 이 가운데 수많은 작품들이 지나치지만 고다르는 그 출처를 밝히는 데 특별한 관심을 두지는 않는 모양이다. 수많은 대담을 통해서 고다르는 말한다. 언제나 출처보다는 목적지가 중요하다고 말이다.
 
출처보다는 목적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그와 같은 순간을 대면하지 않은 이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출처보다는 목적지가 중요하다는 믿음이야말로, 고다르와 그를 따르는 이들, 말하자면 지난 시대와 이 시대의 영화광들을 묶어주는 생각이고 이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킴스 비디오>는 가장 충실한 고다르의 후예들에 대한 이야기다.
 
88분짜리 다큐멘터리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형식을 띄고 있다. 고다르의 후예들이 용의 소굴로 들어가서 저의 공주를 구해오는 이야기인 것이다. 카메라 뒤에 선 사람이야말로 용사이고 고다르의 후예가 될 것인데, 그의 이름은 데이빗 레드몬이다. 뉴욕의 영화감독이자 영화제작자로, 2004년 72분짜리 다큐 <메이드 인 차이나>를 시작으로 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왔다.

그가 오랜 동료 애슐리 사빈과 함께 찍은 작품이 <킴스 비디오>로, 그들과 아마도 뉴욕의 모든 영화애호가가 사랑했을 공주를 구해오는 이야기를 한 편의 다큐에 담았다. 그 공주는 영화 그 자체이며, 5만5000여 개의 DVD와 VHS의 형식으로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작은 도시 살레미에 갇혀 있는 것이다.
 

▲ 킴스 비디오 포스터 ⓒ 오드 AUD

 
공주를 구하려는 용사들의 모험
 
처음 데이빗과 애슐리는 그들의 공주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두 용사는 그저 오랫동안 저들이 사랑했던 공주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뿐이다. 둘은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용사가 될 자질이 있는 이들이었으므로 용사의 무기인 카메라를 켜고 공주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킴스 비디오는 198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자리했던 영화광의 성지다. 미스터 킴으로 불리는 정체불명의 사장이 운영하던 이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온갖 영화를 만날 수 있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마틴 스콜세지,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로버트 드니로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영화인들이 단골로 드나들었다.

컬렉션만 해도 5만5000편을 헤아렸고 회원은 25만 명이나 됐다. 세탁소 한 켠에 매대를 두고 영화 몇 편을 빌려주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킴스 비디오의 시작은 뉴욕에 여러 곳의 매장과 수십 명의 직원을 두고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사람을 파견해서 희귀 영화를 구해오는 사업으로까지 번창했다.
 
그러나 사업은 계속되지 못했다. VHS와 DVD라는 형식을 벗어나 영화가 디지털 안으로 들어가면서다. 영화추천 및 대여서비스이던 넷플릭스는 디지털 신사업으로 승승장구했으나, 그보다 훨씬 더 영화를, 특히 희귀영화를 보존하여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했던 킴스비디오는 변화를 견뎌내지 못하였다. 어느 순간 미스터 킴이라 불린 김용만 사장은 사업을 정리하기로 결심했고, 5만5000여 편의 자료를 받아줄 누군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 킴스 비디오 스틸컷 ⓒ 오드 AUD

 
사라진 킴스 비디오는 어디로 갔을까
 
대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와 개인이 킴스 비디오와 접촉한 끝에 최종 대상자가 선정된다. 결과는 놀라웠다. 영화 명문인 뉴욕대학교도 도서관도 아닌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살레미가 상대로 선정된 것이다. 그들은 이 자료를 받아 디지털화하고, 원하는 누구나 접속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공공의 지식창고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킴스 비디오 회원들은 모두 살레미에 방문해 무료 숙박과 영화감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조항도 삽입됐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탈리아의 소도시를 영화를 위해 찾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이 킴스 비디오의 폐업과 그 뒤의 이야기다.
 
두 용사는 한때 저들이 사랑했던 공주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폐업한 킴스 비디오 자리를 찾고 수소문해 그때의 직원들을 인터뷰하며 살레미로 날아가서 저들의 공주가 처한 현 상황을 확인하게 된다.

현실은 참혹했다. 킴스 비디오의 존재를 아는 이는 몇 되지 않고 사업은 이미 문을 닫은 상태다. 어렵게 찾은 건물에선 간판이 빛이 바랜 채 낡아가고 VHS와 DVD는 습한 방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상태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그 자료들의 보관 상태를 보고 있자면 얼마쯤 지난 뒤엔 누구도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폐기물이 되리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넷플릭스와 디즈니, 아마존 등 온갖 OTT 서비스가 세상 모든 영화를 편리하게 제공하는 이상적 서비스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유명한 작품조차 어떤 OTT 서비스 업체에서도 볼 수 없는 상황이 공공연하게 펼쳐진다.

많은 영화가, 유명하지 않은 영화의 경우엔 너무나도 많은 작품이 관객과 닿지 못한다. OTT 서비스 업체는 점점 더 저들과 연관이 있는 작품을 많이 노출시키고 그들이 소유한 작품 안에서 이용자들이 맴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간다. 그 안에 들지 못한 수많은 작품들은, 그러나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일까. 때로는 그와 같은 소외된 작품들로부터 더욱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킴스 비디오가 일찍이 미국 정보기관에게 제 소장품들을 빼앗기면서까지 해냈던 일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 킴스 비디오 스틸컷 ⓒ 오드 AUD

 
마피아와 그를 추적하는 검사까지 등판
 
지적재산권을 숭상하는 이들과 예술을 애호하는 어떤 이들은 그 근본부터가 다를 수도 있겠다.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그와 같은 생각이 머리를 치켜들게 되는데, 고다르와 같은 이가 일찍부터 그러했듯이 출처보다는 목적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킴스 비디오의 여러 직원들이 회상하는 것처럼 이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영상들을 불법으로 복제해 유통하는 일이 지식의 적극적 유통이라 믿었다. 많은 수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뤄졌지만 결코 적지 않은 수가 불법적으로 유통됐다. 스콜세지와 타란티노, 코엔 형제와 여러 영화광들을 열광시킨 건 바로 그와 같은 영상이었다.
 
용사들이 살레미에서 방치된 자료를 구하려 하는 것은, 그중 아주 많은 수가 이와 같이 만들어진 자료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소실돼 구할 수 없는 그 자료들을 이들은 세상 어느 대학교도 박물관도 갖지 못한 지적 보고라고 믿는다. 그건 저들이 사랑하는 공주의 아름다움일 뿐 아니라 남다른 지성이며 성품이고 인격이기도 하다. 그 가치를 아는 이들은 그야말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를 구해내고자 매달린다.
 
영화는 김용만과 살레미 사이에 이뤄진 합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추적한다. 그 합의 뒤에는 이탈리아 정치가이자 당시 살레미 시장이던 비토리오 스가르비가 있었다. 또 그 뒤엔 살레미 시를 좌지우지하는 마피아 집단이 있다. 킴스 비디오 소장품을 둘러싼 대대적인 정부 지원사업과 그에 투자된 돈이 산산이 흩어지는 과정은 어느 누아르 영화 뒤 음모에 못잖은 긴장감을 준다. 용사들은 이를 쫓는 이탈리아 검사를 만나고, 그와 만난 며칠 뒤 그 검사가 돌연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아주 모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 또한 영화적으로 현실을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 킴스 비디오 스틸컷 ⓒ 오드 AUD

 
영화라는 불씨를 간직한 이라면 누구든!
 
한국 관객에겐 이 영화가 더욱 남다르게 느껴질 테다. 1970년대 20대 초반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간 남자, 온 가족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젊은 가장이 자수성가하는 드라마가 이 안에 담겨 있다. 영화를 사랑했던 그는 온갖 역경을 넘어 스스로 영화감독이 되기도 하고, 킴스 비디오를 중심으로 영화광들을 한 데 묶어내는 사업체를 실현시키기도 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이면에 자리한 하나의 문화적 중심을 맨 주먹으로 일궈낸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영화 속 용사들이 마침내 서울에서 김용만 사장과 만나는 장면이 있다. 악당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품은 채로 용사들이 마주한 김 사장은 영화의 끝에서 오손 웰즈의 역작 <시민 케인> 속 사업가와 비견된다. 빔 벤더스의 영화로부터 영화광의 불씨를 얻은 <킴스 비디오>의 용사가 찰리 채플린의 영화로부터 같은 불씨를 얻은 김 사장과 만나 만들어내는 순간이 놀랍다. 영화를 보는 이들 가운데 가슴에 이러한 불씨를 간직한 이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 영화에 반하고야 말 테다.
 
용사가 있고 공주가 있고 공주를 인질로 잡은 용과 그에 다가서기 위한 모험이 있는 영화다. 그 여정은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지식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지식을 둘러싼 성벽만 높여온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낭만이 이들에게 있다. 그럼에 <킴스 비디오>는 지난 시대와 오늘과 미래의 영화팬을 한 데 묶어낼 수 있는 흔치 않은 작품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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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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