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민섭 PD
이영광
- 도쿄 아라카와강변에서 조선인 100명이 학살되었는데 공식 기록은 없나요?
"아라카와뿐만 아니고 제대로 된 공식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정부의 당시 사법성 등에서 작성한 것들은 있어요. 근데 이게 정확한 것은 아니라 굉장히 적은 숫자만 기록이 되어 있고요. 100명이 아라카와 강변에 묻혀 있었다란 건 다 증언 통해서 그 당시 활동가들이 확인하신 거죠."
- 근데 아라카와에서 시체를 다른 데로 옮겼다면서요. 그럼, 유골이 옮겨진 장소는 아예 모르는 건가요?
"저희가 방송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 안 했는데 지진 직후 학살이 일어나고 시체를 묻었잖아요. 근데 1923년 11월이나 12월쯤에 일본 경찰이 몰래 파내서 어딘가로 가져갔어요. 왜냐하면 당시에 학살이 조선인들을 상대로 한 학살도 있었지만 일본 사회주의자와 중국인들도 죽임을 당했어요. 그거에 관련해서 일본 유족분이 유골을 찾게 해달라 요청했어요. 근데 일본인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발굴하다 보면 조선인에 대한 유해도 같이 나올 거 아니에요. 그러면 끔찍한 학살의 전말이 드러나게 되죠. 이것을 우려한 일본 경찰이 기습적으로 파서 어딘가로 가져가 버렸다는 게 그 당시 신문에 나와 있어요. 근데 어디로 가져갔는지 당연히 모르죠."
- 그 후 아무런 조사나 증언이 안 나왔나요?
"조사가 안 나왔죠. 목격자들의 증언 정도만 뒤늦게 나왔죠. 1982년에 다시 유골을 발굴하기 시작했잖아요. 그런 시도가 있었을 때에 증언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거죠."
-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이 각 지방에 보낸 전신문은 어떻게 확보한 건가요?
"사실 그 문서에 대한 존재나 내용에 대해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긴 하죠. 근데 저도 원본을 보고 싶어서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찾아보다가 후쿠시마 의원이 방위성 방위연구소 쪽에 보관돼 있는 걸 확인해서 저희가 그쪽으로 문의했죠."
- 보니까 어때요?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있고 폭탄을 소지하고 있고 불량한 목적으로 행동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계엄령을 내렸다고 얘기를 했잖아요. 굉장히 이거는 의도가 담겨 있는 전시문이죠. 조선인에 대한 경계, 적대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내용이잖아요. 이건 일본 정부에서 당시 조선인에 대해 의도를 가지고 전시문을 내보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죠."
- 지진이 나고 바로 그다음 날 계엄령을 선포한 거잖아요. 이해가 안 가거든요.
"저희도 이해가 안 가요. 그러니까 맥락상으로는 지진 직후의 어떤 되게 불안정한 정세가 일본 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까 봐 저항 같은 걸 사전에 차단하고 책임을 조선인 쪽으로 돌리려는 목적이 아니었나 싶거든요.
- 자경단에 대해 나오던데 국가가 조직한 건가요?
"자경단은 마을 단위 자체적인 치안 조직이긴 한데요. 그러니까 이건 당시 마을 청년 단원들, 민간 소방 단원들이 만든 거긴 한데 국가에서 지시가 내려왔죠."
- 서북청년단이 해방공간에서 활동했잖아요. 자경단이 서북청년단과 비슷한 걸까요?
"이게 1대 1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만.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조직된 면도 있고 거기에 국가의 지시가 있었던 면도 있죠. 서북청년단도 소위 빨갱이에 대한 어떤 적개심에서 만들어졌지만, 당시에 국가의 개입이 있었다는 걸로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봐서는 비슷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국가의 개입이 있었고 특정한 타겟을 대상으로 했고요."
- 어떤 일이 벌어진 건가요? 방송에 보면 사람 죽여서 다리에 매달아 놨다고도 나오던데.
"굉장히 다양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것이죠. 심지어 저희가 방송에 내지 않았습니다만 기록으로 보면 임부를 죽이고 임부의 배를 갈라서 그 안에 있는 아이까지 죽였다는 끔찍한 내용까지 있으니까요. 굉장히 참혹하고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저질렀다고 봐야죠."
- 다나카 마사타카 센슈대학 문학부 교수는 조선인을 사냥한 거라고 하잖아요. 간토 대지진에서 조선인 학살을 한마디로 정리한 것 같던데.
"그렇죠. 저도 동의합니다. 국가에 의한 조선인 학살 사냥이었던 거죠. 좀 충격적인 방식으로 얘기를 해 주셨다고 봅니다."
- 재일교포 오충공 감독이 나오던데 이분은 어떻게 간토 대지진에 대해 취재하게 되었다고 하나요?
"아라카와에서 유골 발굴을 할 때 그때 처음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가면서 그때 영화를 찍으며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습니다."
- 40년 동안 하신 거잖아요. 뭐라고 하세요?
"이분은 계속 기록을 해오셨고 기록이 있어야 기억이 있다고 하시는 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 생존자라든가 자경단 사람들에 대해 인터뷰하면서 그런 기록을 남겼고 지금 유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유족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다음에 유족을 통해서 그때 돌아가신 분 한 분 한 분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조금이라도 밝히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십니다."
- 취재하며 느낀 점이 있을까요?
"저도 취재를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요.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웠고요. 그러면서 이게 일본 정부의 책임이라는 증거가 명확히 있음에도 일본 정부는 인정하지 않고 한국 정부는 어떤 액션을 취하지 않는 게 좀 답답하게 느껴졌고요. 개인적으로 제작하는 입장으로서는 이게 현장도 없고 남아 있는 분들도 없어서 어려운 취재였는데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서 무사히 방송은 나갔던 것 같아요."
- 취재했지만 방송에 담지 못 한 게 있을까요?
"재일 조선인 분 중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계세요. 그분이 일본 대학생들 대상으로 학살 관련한 가이드 하시는 걸 찍은 게 있는데 그게 분량상의 이유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세요.
"사실 이게 100주기여서 하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의 관심, 정부의 관심은 적은 것 같고요. 근데 100년이 지나면 또 언제 또 어떤 계기로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거거든요. 그리고 그나마 지금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도 언젠가는 돌아가실 거고요. 그렇게 되면 제대로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이 사건이 잊히게 되지 않을까라는 게 제일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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