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배두나)의 수사를 통해 소희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점차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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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의 전반부는 소희의 이야기가, 후반부는 소희의 죽음을 추적하는 형사 유진(배두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처음에는 기계적으로 사건을 수사하던 유진은 소희의 죽음을 둘러싼 거대한 불합리를 목도한다. 단순 자살로 치부될 뻔했던 소희의 죽음은 유진을 통해 점차 진실이 드러난다.
<다음 소희>가 훌륭한 영화인 이유는, 소희의 죽음을 '진상'이나 '빌런'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열여덟 현장실습생의 죽음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촘촘하고 차분하게 보여준다.
소희의 죽음은 막말과 성희롱을 일삼는 진상 고객만의 문제도 아니고, 진상 고객으로부터 직원을 지켜주지 않고 경쟁을 부추긴 하청회사만의 문제도 아니고, 하청회사에 과도하게 실적을 압박하고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본사만의 문제도 아니다. 학생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도 모른 채 인력 파견소가 되어버린 학교만의 문제도 아니고, 취업률로 학교의 실적을 평가하는 교육 당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모두의 부정의가 쌓이고 맞물려 열여덟 소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영화를 보면서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듯이, 한 아이를 죽이는 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희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몰랐다고, 내가 무슨 힘이 있냐고, 나보다는 저쪽이 잘못한 거 아니냐고 탓하기에 바쁘다. 이러한 반응에 오유진 형사는 분노에 차서 말한다.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 탓이라는 사람이 없어."
S초 교사의 죽음에도 교육 현장의 여러 구조적 문제가 얽히고설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진상 부모'의 문제로만 이번 사건이 인식되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진상 부모'만 사라지면 교사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진상 부모가 '악성 민원'을 쏟아내는 동안 학교는, 교육 당국은 대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나. 교사와 학생 사이, 교사와 학부모 사이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과연 어떤 도움이 될까. 착잡하고 답답하다.
'다음 죽음'을 막기 위해서
영화에서는 유진의 분투를 히어로물처럼 그리지 않는다. 평범한 형사 한 명이 경찰 조직을 바꾸는 것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당신이 막을 수 있었잖아, 왜 가만히 있었냐고"라며 화를 내는 유진에게 교육청 장학사는 딱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적당히 합시다. 일개 지방 교육청 장학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다음에는 교육부 가실 겁니까?"
유진 역시 소희의 죽음의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관리 팀장이 죽었을 때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고 덮은 것은 경찰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거대한 음모론 같은 것은 없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 경찰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배두나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연기하는 유진을 자꾸만 응원하게 되는 것은, 유진이 누구도 하지 않았던 '상식적인 어른'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소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을 바꿔야 할지 고민하는 유일한 어른이다.
'이렇게 해봤자 뭐가 변하겠어'가 아니라 '이렇게 했더라면 소희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진지하게 곱씹는 사람. '다음 소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은 유진 같은 사람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유진 곁에 더 많은 유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소희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세상은 거대한 빌런 한두 사람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누가누가 더 잘못했나' 게임이 아니라, 한 교사를 죽이는 데 필요했던 '마을'이 무엇이었는지를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숨진 교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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