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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상 가장 숨 막히는 롱테이크, 이 영화에 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450] <400번의 구타>

23.02.18 11:43최종업데이트23.02.1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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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번의 구타 포스터 ⓒ 백두대간

 
롱테이크는 컷 없이 화면을 오래 찍는 기법을 말한다. 보는 이의 사고 속도보다 빠르게 화면을 잘라 이어붙이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오늘의 편집에선 잘 쓰이지 않으나, 이따금씩 롱테이크를 활용한 명작이 탄생할 때도 있다.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버드맨>이나 촬영상을 받은 <1917>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롱테이크 기법을 멋스럽게 활용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 것으로 명성이 높다.
 
한국에서도 <올드보이>나 <살인의 추억> 같은 작품이 롱테이크를 통해 특정 장면을 돋보이게 연출하여 세계적인 호평을 받기도 했다. 짧은 호흡의 편집이 각광받는 시기, 도리어 롱테이크가 강렬함을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를 애정하는 이들에겐 누구나 저마다 손꼽는 롱테이크신이 있다. 롱테이크를 활용하는 연출자 역시 그 장면에 힘을 집중하게 마련이니,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롱테이크신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몇 편의 영화를 꼽을 수가 있을 것인데, 그중 한 편이 바로 <400번의 구타>의 엔딩 시퀀스라 하겠다.

<400번의 구타>는 <네 멋대로 해라>와 함께 누벨바그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고전이다. 누벨바그는 1950년대 정체돼 있던 프랑스 영화계에 인 새로운 물결을 말한다. 기성세대의 관습적 영화제작에 저항하며 나타난 이 흐름은 당시 20대이던 젊은 층이 주도했다. 그 중심에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 뤽 고다르가 있었다.
 

▲ 400번의 구타 스틸컷 ⓒ 백두대간

 
누벨바그의 정점, 트뤼포의 걸작
 
젊은 평론가이던 트뤼포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나가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 중 하나가 <400번의 구타>다. 소년이 처한 험난한 삶 가운데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이 발랄한 영화를 통하여 트뤼포는 새로운 영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적은 예산에도 깊이 있는 인상을 남기는 이야기며 그 창의적 연출법이 당대 영화계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그 중에서도 영화의 마지막 몇 분은 오래도록 회자되는 명장면이 되었는데, 가장 중심 되는 기법이 롱테이크인 것이다.

이야기는 열두 살 소년 앙투안 두아넬의 일상을 내보인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어머니와 새아빠 사이에서 자란 앙투안은 일찌감치 문제아로 낙인 찍힌 소년이다. 학교 선생은 억압적이고 부모 역시 제게 관심을 주지 않는 통에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살아간다. 처음엔 짓궂은 장난으로 시작한 일들이 차츰 커져 문제를 일으키고 마침내 선생과 부모 모두에게 버림을 받기에 이른다.

앙투안을 진정으로 이해하려 하는 건 단짝친구 르네 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소년이기에 서로를 완전히 책임질 수 없다. 앙투안의 삶은 갈수록 고달파진다.
 

▲ 400번의 구타 스틸컷 ⓒ 백두대간

 
열 두 살 소년의 고달픈 삶
 
내게 어느 친구가 유명한 만화가의 말을 전하기를, 어느 작품은 단 한 문장을 위해 이야기 전체를 써내려가기도 한다고 하였다. 나머지 말은 그 한 문장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쓰일 뿐, 진정으로 전하려는 건 단 하나의 메시지란 것이다. 그렇다면 <400번의 구타>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일까.
 
트뤼포는 이 영화에 제 어린 시절을 마음껏 투영했다 하였다. 제게 관심을 두지 않던 부모와 억압적인 학교, 오로지 영화만이 탈출구가 되어주었던 그 시절을 이 영화 가운데 고스란히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앙투안은 어느 글쓰기 수업에서 발자크의 문장을 의지해 제 글을 써내려갔다. 선생은 이를 표절이라 하였는데, 그는 그저 발자크를 좋아했을 뿐 어느 작품을 베끼려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르네만이 앙투안이 무엇도 베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러나 문제아로 낙인찍힌 앙투안은 쫓겨날 밖에 도리가 없다.
 
앙투안은 말한다.
 
"제가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아요. 그러니 거짓말하는 게 낫죠."
 

▲ 400번의 구타 스틸컷 ⓒ 백두대간

 
그 숨막히는 롱테이크 신을 생각하며
 
세상은 그를 믿지 않고, 그가 실제보다도 훨씬 더 부적절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 모든 억압과 몰이해, 폭력 가운데 앙투안은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몇 분은 바다를 향해 달리는 소년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그가 그렇게 달려 도착한 바다를 보고 뒤돌아선 눈빛까지를 담아냈던 마지막 얼마의 시간이야말로 이제껏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인 롱테이크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통상 해방이며 자유로 읽히는 그 바다가 <400번의 구타> 가운데서는 막막한 장벽처럼 다가온다. 앙투안은 끝내 그 바다를 넘을 수 없다. 소년의 눈빛이 영화를 보는 이에게 물어오는 듯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하죠?"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아이가 세상에 두 발 딛고 살아가는 어른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그에게 무어라고 답할 수가 있을까. 우리는 과연 우리의 아이들에게 귀를 열고 그들의 사정을 들어보고 있는가 말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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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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