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특집 다큐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연출한 김무성(좌), 조나영(우) PD
이영광
- 조 PD님이 최세창 장관 인터뷰하려고 하셨잖아요. 어떠셨어요?
조: "무섭죠(웃음). 사실 방송에 나가지 못했던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어요. 많은 걸 부인하셨고 본인이 해왔던 (과거) 진술도 거부하시고 부인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두려움도 있으신 것 같아요. 1번으로 관심을 받았던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망 이후 본인에게 오는 그 집중에 대한 두려움도 좀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도 본인은 어쨌든 모르쇠로 일관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게 있어요."
- 조 PD님이 최세창 장관에게 전화해서 5.18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전 바로 전화 끊을 줄 알았는데 안 끊어서 의외였어요.
조: "방심하신 것 같아요. 설마 나한테 지금 당장 전화가 오겠어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 운이었던 것 같아요."
- 집에 갔지만 없어서 전화하신 거잖아요. 잠복할 생각은 안 하셨어요?
조: "저희가 현장에서 잠복하고 있었고 저희가 허탕을 친 것도 있었어요. 뭐였냐면 집 방문 시도하고 전화 통화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마치 그 행색(과 비슷한) 분이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하시면서 도망치듯이 길을 막 건너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건너서 그분을 쫓아갔죠. '최세창 장관님이세요?'라고 하니까 아니다라고 저희가 허탕을 쳤죠."
- 부상자들을 실은 트럭에 최루탄을 투하했다고 나오던데 왜 투하했을까요?
조: "그걸 옆에서 보셨던, 실명을 밝히기는 그렇지만 계엄군 중에 한 분이 그 말씀을 하셨어요. 개인적인 재미로 처음에 그러더라는 거예요."
김: "저는 또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왜냐하면 그때 21일에 전남대학교 상황이 매우 위험했어요. 5만 명의 시민들이 전남대를 에워쌌거든요. 그런 상태에서 퇴각했고 전남대 운동장에서 사병들에까지 실탄 지급이 이루어졌었거든요. 그날은 그 상태로 상황이 급박한 상태에서 도보로 이동하니까 도보로 이동하는 상황에서도 시민과의 교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시민군들을 좀 조용히 잠잠하게 시키기 위해서 최루탄을 깐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죠. 또 하나는 저는 또 특이한 게 7공수하고 11공수가 조선대에 있었을 때 7공수 11공수는 잡혀 있던 시민군들을 경찰에 인수인계하고 경찰은 다 훈방 조치 하거든요. 근데 유독 3공수만 잡혀 있는 시민군들을 데리고 이동해요. 저는 그 점이 또 좀 의아하더라고요."
- 제가 <나는 계엄군이었다>와 <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 보면서 든 생각이 뭐였냐면 계엄군에게 살인 면허를 내준 것 같았거든요. 사람 죽이는 걸 아무렇지 않게 하잖아요. 계엄군은 사람 죽여도 된다는 생각이 없었을까요?
김: "저는 두 가지라고 보는데요. 하나는 개인의 일탈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증언을 들어보면 이미 돌아가신 시민군의 시신을 단검으로 훼손하는 계엄군들도 있었어요. 개인의 과한 폭력성을 드러낸 것도 사실이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포 명령이 있었고 발포는 명령이 없이는 불가능하잖아요. 발포 명령이라는 건 결국은 죽여도 된다는 것과 똑같으니까 우리가 발포 명령에 대해서 계속 추적하고 해야 되는 게 그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아무리 군대지만 '야 사람 죽여도 돼'라고 명령 내리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발포하라는 건 그 안에 죽여도 된다는 암묵적인 동의들도 있는 거 아닌가 하죠."
- 42년이 지났지만, 계엄군도 트라우마가 있나 봐요?
김: "모든 계엄군이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요. 저희를 만나주는 분들은 대부분 트라우마가 있는 분들이었어요. 근데 작년에 <나는 계엄군이었다>에 출연했던 최병문 선생님께 공격하고 힐난했던 당시 계엄군 하사관이 또 있었어요. 그 사람은 전혀 거리낌이 없죠. 그러나 만나주고 증언 하는 사람들은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 어떻게 지내왔다고 해요?
김: "지금도 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요. 저희 프로그램에 나왔던 해남의 김승식씨 같은 경우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자기는 5월에 꽃구경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래요. 5월 되면 꽃구경 자체를 못 가실 정도로 트라우마가 있죠. 제가 서울에서 만난 분은 버스 기사 하셨는데 만난 그날이 버스 기사 계약이 종료가 된 날이었어요. 그분이 또 하는 말이 '나는 광주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나는 내가 힘들다는 말조차도 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를 못 해준다'라고 하셨죠."
- 옛 광주 교도소에 13구의 시신을 암매장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찾지 못했고 1983년 보안부대 요인들이 묻었다고 나오던데 1983년 즈음 왜 시신을 옮겼을까요?
김: "그건 저희가 뭐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는 문제이긴 한데 저희가 최명룡씨 인터뷰 다음에 서류를 붙였잖아요. 그걸 붙인 이유는 그 서류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이미 관계 당국들은 시신을 가매장 혹은 암매장했던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라는 문서니까 이미 얘네들은 알고 있었죠. 근데 객관적인 사실로만 열거하면 묻었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묻었다는 사람들이 지정한 곳을 다 파봤더니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합리적으로 옮겼겠다는 걸 유추할 수가 있는 거고 왜 옮겼는지는 제가 지시를 내린 신군부가 아니니까 모르겠지만 미루어 짐작해 보면 사망 수를 축소해야 되는 게 그들에게 당면 과제였을 수 있죠. 현재 공식적으로 사망자가 165명이지만 신고된 행불자는 300명이 넘어요. 공식적으로 인정된 행불자만 78명이거든요. 그니까 신군부는 될 수 있으면 사망자를 줄여야 되는 당면 과제가 있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요."
- 엔딩 장면의 퍼포먼스는 어떤 의미일까요?
조: "그동안 고백하지 못한 계엄군들이 가면 속에 가려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면 이미지 통해서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계엄군의 이미지를 상징화했고 또 전체적으로 퍼포먼스 길이가 한 50초 정도 되거든요. 전반부 25초는 계엄군이 그렇게 했다라는 객관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거고 후반부인 25초 정도는 고백하는 계엄군들이 돌아가신 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퍼포먼스로 진행했었습니다."
- 제작하며 느낀 점 있을까요?
조: "저는 다음 세대에게 이걸 어떻게 전해야 될지에 대한 고민과 생각의 출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죠."
김: "저는 5.18 취재를 입사 때부터 했으니까 오래 했는데요. 2004년도에 제가 입사했거든요. 매번 할 때마다 듣는 게 뭐였냐면 언제까지 5.18이냐는 거예요. 내부에서도 더 이상 다룰 게 있냐는 거예요. 그런데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를 아직 정확히 우리는 기록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독일 같은 경우도 홀로코스트를 아직도 추적하고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됐다고 벌써 5.18을 많이 한 양 말하죠. 근데 우리는 사실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정확히 기록하지도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게 모든 게 정확히 기록될 때까지는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취재했지만 방송엔 나오지 않은 게 있을까요?
조: "아쉬운 것들이 있습니다. 저희가 원래 또 다른 한 명의 계엄군 취재를 했었고 그분은 사실 현장에서 대검으로 우리 시민을 찔렀던 분이 있어요. 그분의 이야기는 저희가 내부적인 조율로 제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얘기를 다음번에 한 번 또 길게 가져보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정도로만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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