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영화관의 모든 관객을 울린 16분짜리 영화

[김성호의 씨네만세 156] 제9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건진 보석 <엄마의 편지>

16.10.23 10:47최종업데이트17.11.12 21:33
원고료로 응원
제9회 서울노인영화제 포스터
제9회 서울노인영화제포스터SISFF2016

가끔 그런 기사를 읽는다. 길을 걷다, 밭을 갈다, 산에 오르다, 수영을 하다, 기타 등등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우연히 어떤 물건을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그 물건이 어마어마한 가격의 보물이라는 소식. 해외토픽에서 흔히 보이는 그런 기사 말이다. 때로는 귀한 약초이거나 오래된 골동품이고 보석 원석, 지구 밖에서 날아온 운석, 또는 인류 역사보다 오래된 화석이기도 한 물건들.

얼마 전 그런 기사 하나를 봤다. 이달 3일 미국 아칸소 주 다이아몬드 분화구 국립공원을 딸과 함께 산책하던 댄 프레더릭(52)이란 남성이 산책 도중 2캐럿이 조금 넘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했다는 것. 아직 정확한 가격이 매겨지진 않았다지만 꽤나 횡재인 건 분명하다. 그가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공원에선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데, 그건 이곳이 일반인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찾아 분화구 곳곳을 헤맬 수 있고 발견할 경우 가져갈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공원이기 때문이라고. 다이아몬드를 찾은 사람은 보석을 갖게 되고 공원은 토픽이 보도돼 더 많은 방문객이 찾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란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얼마 전 나도 보석을 주웠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댄 프레더릭이 자신의 다이아몬드와 바꾸자고 해도 거절할 그런 보석을 주웠다. 찾은 곳은 제9회 서울노인영화제가 열린 아리랑시네센터고 보석은 <엄마의 편지>란 작품이다. 이곳에선 누구나 나와 같이 보석을 줍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운이 좋아 보석을 찾는다면 그 감격을 간직할 수 있다. 얼마나 좋은가.

작은 영화제에서 발견한 보석

엄마의 편지 할머니(이춘자 분)가 아들에게 편지를 써줄 사람을 찾아 광주의 조카집을 찾은 장면.
엄마의 편지할머니(이춘자 분)가 아들에게 편지를 써줄 사람을 찾아 광주의 조카집을 찾은 장면.SISFF2016

<엄마의 편지>는 서울노인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출품된 39편 가운데 하나로 16분 14초짜리 단편이다. 광주영상미디어클럽 10여명 회원들이 독립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해 온 이체 감독의 지도 아래 제작·연출·편집 등 필요한 여러 작업을 분담했다. 촬영은 4일 동안 진행됐으며 전문적인 영화인의 도움을 받은 건 동시녹음 단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제작은 문화 관련 재단으로부터 지원받은 300만원으로 이뤄졌다.

영화는 감격적이다. 관심이 없다면 열리는 줄도 모르고 지나칠 법한 작은 영화제, 그곳에서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영화치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좋았다. '삶의 반추'로 이름 붙여진 단편경쟁 두 번째 묶음, 네 편의 영화 중 마지막 작품이었던 <엄마의 편지>는 영화관 안에 든 모든 관객을 울리고서야 그 엔딩크레딧을 올렸다.

영화는 전남 보성 바닷가마을에 사는 80대 할머니의 하루를 담담한 시선에서 기록한다. 할머니는 이제나 저제나 외항선원인 아들의 편지를 기다리는데 어느 날 아침 만난 집배원의 충고에 따라 직접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탓에 이곳저곳에 부탁을 해보지만 여의치 않자 광주에 사는 조카 집을 찾아 나선다.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가슴 아린 이 영화의 진가는 막판 3분 남짓한 시간에 몰려 있다. 앞의 장면은 뒤의 장면을 본 이후에 새로운 의미를 갖고 뒤의 장면은 앞의 장면과 맞물려 영화를 보다 나은 위치로 끌어올린다. 수십억 제작비가 우스운 영화를 매주 만나는 요즘 관객이라면 연출과 구성 면에서 다소 투박하게 느낄 법도 하지만, 영화는 그 모두를 일거에 만회할 만한 장점을 지녔다. 드물게 만나는 진심이 담긴 연기, 그로부터 빚어지는 진솔한 드라마가 그것이다.

할머니가 아들에게 전한 메시지, 그로부터 감춰졌던 모든 사실이 제 모습을 드러낸 3분 남짓의 장면은 가장 메마른 심장을 지닌 사람조차 동요하게 할 만큼 강한 힘을 내보였다. 영화제 첫날 객석에서 영화를 본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수년 동안 본 수백편의 영화에서도 이에 비할 만큼 진솔하고 강렬한 장면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이건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고결한 수준의 드라마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상영관에 들어 있던 모든 관객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엄마의 편지> 상영이 끝나고 예정된 GV행사 진행이 잠시 멈춰졌을 만큼 영화가 남긴 감흥은 컸다. 그렇게까지 관객들의 감정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던 건 이 영화가 흔한 신파, 감정에 호소하는 전형적 연출과 연기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전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화가 이룩한 성취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건 주인공을 맡아 연기한 78세 이춘자 할머니였다. GV행사에 오른 영화 관계자는 그녀가 이 영화 전까지 단 한 차례도 영화에 출연하거나 연기를 배운 적이 없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이 같은 울림 있는 연기가 가능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도 의식하지 않는 순수한 몰입. 자연스러움을 흉내 내는 세련된 연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있는 그대로의 슬픔. 그 몰입되고 응축된 슬픔이 고스란히 관객에 전해졌기에 그 같은 감상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었다.

한 번도 카메라 앞에 서본 적 없는 78세 할머니

엄마의 편지 주연을 맡은 이춘자 할머니(78). 단 한 번도 연기를 해본적 없는 그녀의 연기에선 전문배우에게 느끼기 어려운 진정성이 넘쳐난다.
엄마의 편지주연을 맡은 이춘자 할머니(78). 단 한 번도 연기를 해본적 없는 그녀의 연기에선 전문배우에게 느끼기 어려운 진정성이 넘쳐난다.SISFF2016

너무도 감격적인 영화였던 나머지, 영화를 보고 난 다음날 영화제 사무국을 통해 이체 감독의 연락처를 얻어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우선 영화는 앞에 언급한 것처럼 광주영상미디어클럽 회원들의 공동 작업이다. 센터 수강생들의 평균 나이가 높기 때문에 자연히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나이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체 감독은 "광주에 영상미디어클럽이라고 어르신들이 같이 공부를 하는 게 있는데 내가 워크숍을 지도해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됐다"며 "촬영, 배우, 스태프를 그 분들이 다 했는데 60대 초반부터 80이 넘는 분까지 10여분 정도다. 영화에 자막도 넣고 외국 영화제에 내려고 하는데 그건 80넘은 할머니 한 분이 맡아 번역도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 제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무엇이냐 물으니 캐스팅과 관련한 답이 돌아왔다. 이 감독은 "<집으로> 주인공 같은 리얼한 할머니를 찾아야 한다고 주위에 수소문을 했다"며 "전혀 연기도 안 해봤고 이 분야를 모르는 사람이라며 사진을 보여줘서 만나보니 이빨도 빠져있고 80이 넘은 것처럼 보였다"고 첫 인상을 떠올렸다. 그는 "목소리를 걱정했는데 대사도 또렷하게 하고 체력이 좋아야 한다고 했더니 매일 밭에 가서 일을 한다고 해서 바로 (캐스팅을) 결정했다"며 "촬영에 들어가니 어린애 같은 순수함이 있어서 그런지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연기하더라"고 전했다.

이체 감독 대신 영화제를 찾은 조감독 강홍길씨는 간절함이라는 키워드로 영화를 표현했다. 영화에서 중점을 둔 부분에 대해 묻자 그는 "80이 넘고 교육을 못 받아 문맹인데다 치매기까지 있는 노인으로 주인공을 설정했다"며 "노인이 만날 수 없는 아들에게 마음을 전하려는 간절함을 담아내려 했다"고 답했다.

<엄마의 편지>는 이번 제9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입상에 실패했다. 심사위원들에게 더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상은 서영숙 감독의 <청춘꽃매>와 강지숙 감독의 <깊고 오랜 사랑>에 돌아갔고 관객심사위원상은 박일 감독의 <파양>과 문지원 감독의 <나의 자리>가 받았다. 관객상은 이미지 감독의 <박스>가 수상했다. <엄마의 편지>는 어떤 분야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수상하지 못했다 해서 영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상영이 끝나고 관객들이 보인 반응이 이를 증명한다. 비록 전문 배우가 여럿 출연하고 전문 영화인이 연출을 맡은 작품보다 서툴게 보이는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한 연기와 그 연기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극본과 연출이 충분히 훌륭했다고 판단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 이 영화는 뜻밖에 찾은 보석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제9회 서울노인영화제 SISFF2016 엄마의 편지 이춘자 김성호의 씨네만세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