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편지할머니(이춘자 분)가 아들에게 편지를 써줄 사람을 찾아 광주의 조카집을 찾은 장면.
SISFF2016
<엄마의 편지>는 서울노인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출품된 39편 가운데 하나로 16분 14초짜리 단편이다. 광주영상미디어클럽 10여명 회원들이 독립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해 온 이체 감독의 지도 아래 제작·연출·편집 등 필요한 여러 작업을 분담했다. 촬영은 4일 동안 진행됐으며 전문적인 영화인의 도움을 받은 건 동시녹음 단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제작은 문화 관련 재단으로부터 지원받은 300만원으로 이뤄졌다.
영화는 감격적이다. 관심이 없다면 열리는 줄도 모르고 지나칠 법한 작은 영화제, 그곳에서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영화치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좋았다. '삶의 반추'로 이름 붙여진 단편경쟁 두 번째 묶음, 네 편의 영화 중 마지막 작품이었던 <엄마의 편지>는 영화관 안에 든 모든 관객을 울리고서야 그 엔딩크레딧을 올렸다.
영화는 전남 보성 바닷가마을에 사는 80대 할머니의 하루를 담담한 시선에서 기록한다. 할머니는 이제나 저제나 외항선원인 아들의 편지를 기다리는데 어느 날 아침 만난 집배원의 충고에 따라 직접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탓에 이곳저곳에 부탁을 해보지만 여의치 않자 광주에 사는 조카 집을 찾아 나선다.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가슴 아린 이 영화의 진가는 막판 3분 남짓한 시간에 몰려 있다. 앞의 장면은 뒤의 장면을 본 이후에 새로운 의미를 갖고 뒤의 장면은 앞의 장면과 맞물려 영화를 보다 나은 위치로 끌어올린다. 수십억 제작비가 우스운 영화를 매주 만나는 요즘 관객이라면 연출과 구성 면에서 다소 투박하게 느낄 법도 하지만, 영화는 그 모두를 일거에 만회할 만한 장점을 지녔다. 드물게 만나는 진심이 담긴 연기, 그로부터 빚어지는 진솔한 드라마가 그것이다.
할머니가 아들에게 전한 메시지, 그로부터 감춰졌던 모든 사실이 제 모습을 드러낸 3분 남짓의 장면은 가장 메마른 심장을 지닌 사람조차 동요하게 할 만큼 강한 힘을 내보였다. 영화제 첫날 객석에서 영화를 본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수년 동안 본 수백편의 영화에서도 이에 비할 만큼 진솔하고 강렬한 장면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이건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고결한 수준의 드라마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상영관에 들어 있던 모든 관객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엄마의 편지> 상영이 끝나고 예정된 GV행사 진행이 잠시 멈춰졌을 만큼 영화가 남긴 감흥은 컸다. 그렇게까지 관객들의 감정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던 건 이 영화가 흔한 신파, 감정에 호소하는 전형적 연출과 연기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전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화가 이룩한 성취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건 주인공을 맡아 연기한 78세 이춘자 할머니였다. GV행사에 오른 영화 관계자는 그녀가 이 영화 전까지 단 한 차례도 영화에 출연하거나 연기를 배운 적이 없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이 같은 울림 있는 연기가 가능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도 의식하지 않는 순수한 몰입. 자연스러움을 흉내 내는 세련된 연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있는 그대로의 슬픔. 그 몰입되고 응축된 슬픔이 고스란히 관객에 전해졌기에 그 같은 감상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었다.
한 번도 카메라 앞에 서본 적 없는 78세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