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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읽는다고 뭐 달라질까"
양희은 18년간 붙잡은 편지들

[장수프로④-1] 41년 된 라디오 프로 <여성시대>, 여전히 사랑받는 비결

16.10.15 16:22최종업데이트17.02.1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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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표준FM의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가 7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생방송되고있다. ⓒ 이정민


라디오는 약속의 매체다. 사실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약속한 그 시간, 익숙한 그 목소리를 약속이라도 한듯이 들려준다. 당장 내일이라도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음에도 우리는 어제 그 목소리가 들렸으니 오늘도 들릴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한다. 정 붙이고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개편하며 사라지거나 혹은 진행자가 바뀌었을 때 이것이 주는 '싸한 허전함'은 결코 작지 않다. 우리는 모두 한 명 이상의 디제이를 가슴 속에 품고 살지 않나.

상대적으로 다른 매체와 비교했을 때 라디오의 경우 프로그램 수명이 길다. 진행자 역시 자주 바뀌지 않는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주는 내밀한 속성 탓이 아닐까. 그 중에서도 <여성시대>는 단연 압도적이다. 1975년 <여성살롱>으로 시작한 라디오 <여성시대>는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41년째 지키고 있다. 이 방송을 매일 듣는 청취자들은 <여성시대>가 없는 자신의 삶은 이제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전 9시 5분 전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시그널 음악과 함께 <여성시대>는 41년치 방송에 하루를 계속 더해간다.

지난 5일과 7일 차례로 <여성시대> 프로그램 연출을 맡은 박정욱 피디와 22년을 <여성시대>와 함께 해온 박금선 작가, 그리고 진행자 양희은과 서경석을 만나 라디오 <여성시대>에 대해 물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면 진작 바위를 뚫고도 남았을 <여성시대>가 오랜 시간 동안 청취자들의 생활의 일부가 돼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전달"이 최우선


MBC 표준FM의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의 양희은과 서경석이 7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생방송을 마친 뒤 포즈를 취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 이정민


<여성시대>의 제작진과 진행자가 공통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한 건 '전달'에 관한 부분이었다. 사연 중심으로 구성되는 방송이니만큼 최대한 그 사연을 "내 것을 보태지 않고 그 사람이 느낀 그대로"(양희은)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편지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박금선)

"어떤 프로그램이든 진행자에 의해 어느 정도 색깔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여성시대>만큼은 청취자의 사연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쓸데없는 기교나 욕심으로 청취자의 사연이 잘못 전달되지 않게 하려고. 얼핏 생각하면 청취자의 사연을 그대로 내보내는 게 더 편하지 않느냐고 생각할수도 있는데 오히려 날 것 그대로 온전히 사연을 전달하는 건 쉽지 않다. 그 부분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 (서경석)

"청취자들이 보내준 사연의 힘으로 <여성시대>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그게 우리 프로그램의 핵심이고 진행자나 제가 연출하는 것도 그 사연을 가장 잘 풀어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박정욱 피디)

MBC 표준FM의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의 박정욱 PD ⓒ 이정민


<여성시대>는 생방송 중! ⓒ 이정민


더 정확하고 재미있는 전달을 위해 양희은과 서경석 두 사람은 사연을 읽으며 역할을 배분한다. 대화 상대가 여성일 경우 진행자 양희은이 대신 그 여성의 감정을 살려 읽는 식이다. 서로 주고받기를 하는 이 호흡을 양희은은 '피겨 스케이팅 복식조'에 비유했다.

"내가 춤을 출 때 공중에서 돌면 밑에서 받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점프해서 올라가는 거지. 라디오 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있다. '부부라면 차라리 이혼이라도 하지' 서로 적대시하면 그 두 사람의 호흡이 청취자들에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71년부터 99년까지 혼자만 진행을 해와서 '멕이고 받고 던지고 받고'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혼자 하면 허전할 것 같다. (웃음)" (양희은)

"나보다 경력이 오래 되고 인생 선배이신 분과의 진행은 최초였다. 사실 처음에 걱정을 많이 했고 잘 맞출 수 있을까 싶었다. <여성시대>가 이미 40년 넘게 진행돼 온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인데 병아리로 들어와서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그런데 잘하더라고. (웃음) 워낙 누님의 내공이 뛰어나기도 하고." (서경석)

"에이이이." (양희은)

"나름대로 성공적인 진행자 합류라고 생각한다." (서경석)

"그래 맞다. 우리 참 좋다." (양희은)

듣기의 힘

'남의 일'을 자기일처럼 듣기란 쉽지 않다. 특히 <여성시대>로 오는 사연들은 차마 들을 엄두가 나지 않는 무거운 사연들인 경우가 많다. <여성시대> 청취자들은 그 '사람 사는 이야기'가 삶을 살아가는데 배움을 줄거라고 믿는다. 박금선 작가는 <여성시대> 속 무거운 이야기를 태교로 듣는 사람도 있다고 언급했다.

"<여성시대>로 태교했다는 젊은 엄마들이 많다. 아기에게 이야기하는 거다. '이게 인생이야'라고. 우리 아기도 결국 부대끼며 세상을 살아가야 하니까. 지금은 은퇴하신 정신과 선생님이 출연해서 내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듣고 울거나 웃으면 정신건강에 도움을 준다더라."

하지만 직접 이런 사연을 읽는 진행자들 마음은 어떨까. 작년 <여성시대>로 온 진행자 서경석은 그래서 방송 중에 많이 운다. 진행자 서경석은 "한 번 도저히 너무 슬퍼서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며 "구석에서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서경석은 "지금은 너무 슬픈 사연이 시작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오면 마음속으로 미리 울어둔다"고 한다.

<여성시대>는 웃으면서 들을 수 있는 가벼운 사연부터 주변인들에게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무거운 사연까지 아우른다. ⓒ 이정민


"참 어두운 사연들이 많다. 내가 아침에 이 사연을 읽어준다고 해서 그 사람 인생이 뭐가 달라질까. 때리는 남편이 때리지 않기를 하나 그렇다고 빚을 누가 확 갚아주기를 하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 짓거리란 말인가 싶었다. 훅훅 씻어내지 못하는 성격이라 모두 간직하고 있다가 상담소 소장님들이 출연하면 그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이 모든 사연을 듣고 대체 어떻게 살고 견디느냐고. 그 분들도 각자 상담 선생님이 있어 모여서 상담을 하고 지나간다더라. 한 5년 정도 발광을 했다. 나 이 프로그램 안 한다고.

그러다가 어느 날 전유성 선배와 같이 방송을 하는데 전유성 선배가 그러더라. '왜 식전 아침부터 이렇게 칙칙하게 매 맞는 여자들 사연을 우리가 배달해야 하지?' 그때 얼결에 '이런 사연 안 올 때까지 해야해!'라고 답했다. 나는 '여성시대'라는 타이틀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 것들 또 부당한지조차 모르는 것들. 우리 세대만 해도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하고 틀이 있지 않았나. 그래서 '여자들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자'고 '여성시대'라 붙인 게 아니겠나. 아직도 편지가 오는 걸 보면 조선시대 말기에 사는 것 같은 분도 계시고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나 싶다. 하지만 놀라운 건 방송에 사연이 나가면서 그 사람 삶을 흔들고 변화를 준다는 것이다. 조용히 혼자 준비해 애를 데리고 집에서 나와 새로운 삶을 살는 사람도 있고 물론 그 사연조차 쓰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들이 자기 삶을 무대에 놓고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서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렇게 거대한 어깨동무가 만들어지는 거다. 세상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고 혹은 나도 일어나 사람답게 살고 싶고. 분연히 스스로 결심하고 삶을 완전히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연을 쓰는 사람들은 경품을 받길 원하지 않는다. 아무데도 털어놓을 수가 없기에 그래도 매일 듣는 목소리가 있으니 저 사람들 앞으로 (보내는 것이다). 가슴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다. 28년 동안 <여성시대>를 해오면서 마음을 다해 하는 인사를 받게 된다. 내 손을 한 번 잡고 눈을 보고 또 <여성시대> 이야기를 한다. 그 인사는 참 다르다." (양희은)

이 어깨동무. 세대 별로 혹은 사안 별로 성별로 자신이 공감 가는 사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자꾸 마음이 쓰인다. <여성시대>가 사연만으로 운영되는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인 것 같다고 말하는 박정욱 피디의 말에서는 안타까움과 자부심이 동시에 드러난다. 박정욱 피디는 "사연만으로 전체 프로그램이 유지된다는 점이 <여성시대>의 매력"이라며 "자신의 사연을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고 또 문자를 보내 공감을 해주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게 되고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고 했다.

"상당수의 청취자들이 익명으로 사연을 보낸다. 그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이 말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섭섭했다 만족했다 고마웠다 사랑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을 달래는 거다. 그 자체로 <여성시대>는 소중한 프로그램이 아닐까. 슬픈 사연이 방송되는 날에는 실시간으로 '저 지금 운전하다가 차 세워두고 울고 있어요'라는 문자가 온다." (박정욱 피디)

MBC 장수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 앞으로 청취자가 보낸 자필 편지. ⓒ 이선필


<여성시대>의 박금선 작가가 청취자가 보내온 손편지를 들고 있다. ⓒ 이선필


"종이를 꺼내서 진지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손편지도 줄고 우표 붙여 오는 편지는 더 많이 줄었다. 시대의 변화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사연 중심 방송이 다른 방송사에도 있었는데 많이 사라졌다. 편지가 주인공인 프로그램은 <여성시대>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오래오래 이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박금선 작가)

양희은은 10년 전 인터뷰에서 음악보다 라디오가 더 즐겁다고 답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일까. 그에게 오랫동안 라디오 진행을 할 수 있는 동력을 물었다.

"데뷔하면서부터 라디오와 인연이 있었다. 매일 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매일 편지를 읽고 매일 소통하고 이렇게 문자가 '즉방즉방' 올라오니까. 오로지 라디오에 대한 짝사랑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 인생이란 학교에서 배움이 있다면 이는 '여성시대' 안에서 할 수 있다고. <여성시대>를 시작했을 때 48세였는데 내 딴에는 많이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로도 여성시대를 통해 정말 많이 배웠다."

"<여성시대>는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다. '나이 꽤 먹었구나' 싶었던 나를 '아직 어린아이구나'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서경석)

내일은 내일의 수다가
<여성시대>는 계속 된다. MBC 사옥이 여의도에서 상암으로 옮겨지면서 버려진 편지들이나 한 번 방송되면 두 번 방송될 일 없는 녹음분이 아쉽지는 않을까. 박정욱 피디와 박금선 작가의 대답은 달랐다.

"이걸 왜 쌓아둬야 하지? 싶다. 수다 떤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굳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거다. 지금의 라디오 기능은 수다에 훨씬 더 가깝다고 본다. 그 순간을 즐기고 흘려보내고. 내일은 내일의 수다가 기다린다. 라디오는 매일 같은 시간에 규칙적으로 찾아오지 않나. 매일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라디오의 특성인데 그러면 언제든지 수다를 떨다 갈 수 있다." (박정욱 피디)

"언제 이 편지가 쓰일지 모르니 버리지를 못 한다. (여의도에서 상암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여성시대> 편지가 창고마다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한동안 "편지들을 스캔해서 타임캡슐처럼 해놓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비용은 누가 대?"라며 의견이 분분했다. 물론 안타깝지만 그걸 다 감당하기는 힘드니까." (박금선 작가)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 박금선 박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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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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