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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L. 잭슨이 받은 링컨의 편지는 진짜였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03] 타란티노의 디테일 돋보인 영화 <헤이트풀8>

16.01.21 11:45최종업데이트16.01.2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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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 <헤이트풀8>의 포스터 <헤이트풀8>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특히 엔딩이 그렇다. ⓒ (주)누리픽쳐스


쿠엔틴 타란티노가 돌아왔다. 여덟 번째 영화 <헤이트풀8>을 통해서다. 언제나 상상한 그 이상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타란티노가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자신의 역량과 스타일을 유감없이 뽐냈다. 때로는 옛 총잡이 영화 같고 때로는 추리물을 연상시키며 한편으론 컬트영화의 분위기까지 엿보이는, 타란티노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2시간을 훌쩍 넘기며 커다란 화면 가득 펼쳐진다.

마치 스티븐 킹의 소설에 등장할 것만 같은 폭풍우 속의 산장, 제약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들이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익숙한 연대기적 구성을 탈피해 시간을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편집의 재미, 신랄하게까지 느껴지는 위트 있는 대사들과 살아 움직이는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 그리고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까지. 흥미로운 지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타란티노의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캐릭터 표현에 있다. 이 영화에서 타란티노가 배치한 엔딩은, 아마도 올 한 해 가장 인상적인 끝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영화 전체를 이끈 캐릭터를 완성 짓는 동시에 이야기를 전환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멋들어진 결말이었다. 보안관을 따라 에이브러햄 링컨의 편지를 암송하는 현상금 사냥꾼 워렌의 입술을 통해 관객은 캐릭터와 이야기, 나아가 타란티노에 대해 비로소 한층 더 깊은 이해를 구하게 됐을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이토록 멋진 장면에 경탄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느 영화, 어느 장면에 감격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다. 이것이 과연 나 하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컬트의 왕'이 불러 모은 쟁쟁한 캐릭터들

▲ <헤이트풀8> 제작 과정 오스왈도 역을 맡은 배우 팀 로스와 대화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 (주)누리픽쳐스


'컬트의 왕' 타란티노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열 명 남짓의 인물을 고립된 산장으로 불러들인다. 관객은 그들 중 누구의 과거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 믿을 수도 없다. 때는 혹한의 계절, 추위마저 가둬버릴 듯한 세찬 폭풍우가 산장을 덮쳐 누군가에겐 위기를, 다른 누군가에겐 기회를 마련한다.

이 상황이 가장 불편한 건 '행맨' 존 루스(커트 러셀 분)다. 다른 현상금 사냥꾼과 달리 잡은 죄인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자신이 잡은 죄인이 교수대에 올라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보길 즐긴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잡은 여자 죄수를 '레드 락 타운'으로 이송하는 중이다. 1만 달러 현상금이 걸린 죄인을 산 채로 호송하고 있는 그에게 모르는 이들과 보내야 하는 며칠이 달가울 리 없다.

그가 호송하는 죄인은 악명 높은 갱단의 일원, 데이지 도머구(제니퍼 제이슨 리 분)다. 구체적인 행적이 설명되진 않지만 행맨에게 시도 때도 없이 얻어터지면서도 패기 있게 어깃장을 놓는 그녀를 범상한 인물로 여기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행맨의 의심처럼 산장에서 만난 사내 가운데 그녀를 구하려는 이가 있는지, 있다면 과연 누구인지가 후반까지 영화를 끌고 가는 추동력이다.

이제 영화의 주인공, 마커스 워렌(사무엘 L. 잭슨 분)의 차례다. 남북전쟁에 북군 장교로 참전해 수많은 백인을 살상한 전설적 인물, 현재는 피도 눈물도 없는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약하는 워렌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다. 시작부터 결말까지 모든 사건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그의 모습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다. 그가 지닌 편지의 진위여부와 그 사실이 밝혀지는 방식이야말로 곧 이 영화의 주제인 동시에 타란티노의 영화가 가진 커다란 미덕이다.

행맨의 마차를 얻어 타고 산장에 도착한 자칭 신임 보안관 크리스 매닉스(월튼 고긴스 분)도 주요한 인물이다. 워렌과 함께 엔딩 시퀀스를 장식하는 크리스는 타란티노의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산만하고 별 볼 일 없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부류의 인물이다. 실없어 보이던 매닉스의 총구에 관객 모두가 신경을 집중하게 됐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타란티노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절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들과 함께 일행을 태운 마차를 몰고 온 마부, 주인이 비우고 떠난 산장을 지키는 멕시칸, 레드락의 교수형 집행관 오스왈도, 부모를 찾아가다 폭풍을 만났다는 카우보이, 남군의 전설적인 장군 출신 노인네가 산장에 머문다. 각양각색의 성격과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빚어내는 흥미로운 사건들은 좀처럼 스크린에서 눈을 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타란티노의 노림수, '링컨의 편지'는 진짜인가?

▲ <헤이트풀8> 속 산장 혹한의 산장에서 뜨거운 연기대결을 펼친 배우들(왼쪽부터 팀 로스, 커트 러셀, 제니퍼 제이슨 리) ⓒ (주)누리픽쳐스


타란티노는 개척시대 서부를 배경으로 스티븐 킹이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과연 누가 범인을 구출할 것인가, 누가 커피에 독을 탔는가 따위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와중에 저마다 독특한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 갈등하고 연대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우연에 우연이 더해져 누군가의 계획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복수의 총구는 돌고 돌아 그 자신을 겨눈다. 이 같은 아수라장 가운데 타란티노의 노림수는 이야기의 본류와 동떨어져 자칫 지나치기 쉬운 디테일에 몸을 숨긴다.

타란티노의 노림수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편지다. 거칠고 무례한 사나이 행맨이 워렌에게 한 번만 보여달라 그토록 정중하게 요청하게끔 한, 매닉스와 오스왈도 역시도 상당한 흥미를 드러낸 한 통의 편지가 타란티노가 배치한 노림수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워렌에게 썼다는 이 편지는 영화의 줄기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으면서도 결말에서 꽃을 피우는 장치다.

처음엔 도머구에게 나중엔 오스왈도와 크리스에게 의심을 샀던 이 편지의 사실 여부는 영화의 또 다른 관심이다. 누가 도머구를 구할 것인가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링컨이 워렌에게 쓴 편지가 과연 진짜인가 하는 것이다. 과연 존경받는 대통령이 보잘것없는 흑인에게 손수 편지를 썼단 말인가?

링컨의 편지는 워렌이 행맨의 마차를 얻어탔을 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행맨이 편지를 다시 한 번만 보여달라고 정중하게 청하고 워렌은 곱게 접힌 편지를 가슴팍에서 꺼낸다. 행맨이 옆에 앉은 도머구에게 링컨의 편지를 보이자 도머구가 편지에 침을 뱉는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이어지는 워렌의 응징. 편지는 진짜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미합중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흑인에게 편지를 썼다고? 그것도 겁쟁이 소리를 듣고 쫓겨나듯 전역한 마커스 워렌에게?' 크리스와 오스왈도의 조롱에 행맨조차 워렌을 의심한다. 자신에게 거짓을 말했느냐는 행맨의 물음에 워렌은 "편지가 없었으면 마차를 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답한다. 행맨은 분노한다. 편지는 가짜다.

타란티노의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하여

▲ 사무엘 L. 잭슨 이보다 타란티노의 영화에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마커스 워렌 역을 맡아 연기한 사무엘 L. 잭슨 ⓒ (주)누리픽쳐스


편지가 다시금 주목받는 건 마지막 장면에서다. 진짜였다가 가짜가 되어 모습을 감춘 편지는 워렌과 크리스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어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죽어가며 편지를 한 번 더 보여달라고 청하는 크리스. 워렌은 그에게 편지를 건넨다. 카메라는 편지를 소리 내 읽는 크리스와 그 소리에 맞춰 조용히 입술을 움직이는 워렌을 한 화면에 잡는다.

이 장면을 두고 편지의 진위에 대한 관객 사이의 논쟁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기자가 봤을 때, 이 편지의 사실여부는 확실하다. 감독이 러닝타임 내내 진위여부를 알려주지 않았던 링컨의 편지가 진짜였음을 모두에게 알린다. 링컨의 편지는, 워렌의 편지는 진짜였다.

편지를 다 읽은 크리스가 "글 잘 썼군요"라고 말하며 구겨 던질지라도, 행맨이 "그걸 믿었어?"라는 워렌의 말에 극도의 분노를 보일 때조차 진위를 확정할 수 없었던 그 편지는 진짜였다. 이것이 바로 이 멋진 영화의 훌륭한 결말이다. 영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엔딩이란 바로 이와 같은 장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편지를 암송한다는 건, 전에 수도 없이 그 편지를 꺼내 읽었다는 뜻이다. 타란티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워렌이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을 멋스럽게 드러낸다.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는 그와 같은 섬세함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정말이지 그의 영화만큼 다채롭고 섬세하게 표현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결말까지 진위 여부를 밝히지 않았던 이 편지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멋스럽게 막을 내린다. 어쩌면 영화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도머구를 구하려는 이가 있었는지, 있다면 누구인지, 행맨과 워렌의 손에서 어떻게 도머구를 구해낼 것인지가 아니라 이 편지가 진정으로 링컨이 워렌에게 보낸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타란티노의 영화를 본다는 건 에이브러햄 링컨의 편지를 암송하는 워렌의 입술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조용히, 하지만 확신에 차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볼 수 있어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헤이트풀8 (주)누리픽쳐스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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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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