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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러 라이브', 이 영화에서 하정우만 보이나요?

[주장] 계급투쟁 그린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의 흥행, 정치 무관심 덕분

13.08.19 18:02최종업데이트13.08.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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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에 영화 내용의 일부가 담겨있습니다

봉준호라는 이름만으로 이미 개봉 전부터 엄청난 기대를 받았던 <설국열차>. 그 뒤에는 이미 <광해>로 1200만 스코어를 낸 '칭기즈칸', CJ엔터테인먼트의 스크린 점령기가 있으니 결과는 안 봐도 뻔했습니다.

하지만 개봉 이후, 김병우 감독의 첫 상업영화인 <더 테러 라이브>가 <설국열차>에 결코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보통 1위, 2위 영화의 간극이 압도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당연한 현상인데, 놀랍게도 난형난제의 모습입니다. (물론, <더 테러 라이브>의 제작비가 <설국열차>의 10분의 1에 불과하기에 손익분기점 기준)

실제로 <더 테러 라이브>는 <설국열차>에 대적할만한 힘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오직 라디오 스튜디오에서만 촬영했음에도 소리가 주는 공간감은 영화의 무대를 마포대교까지 확장시키고, 배우 하정우의 연기력은 관객의 시선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영화는 고작 숨표 한 번 찍을 정도의 틈만 줄뿐 거침없이 몰아붙이다 끝내 제로영역까지 접근하는데, 논리적으로 지적할 부분이 상당히 존재함에도, 그 연출의 힘은 관객들에게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범인과 장기간 함께 지내며 범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동조하면서 범인을 잡으려는 경찰을 적대시하게 되는 심리현상)을 선사해 줄 정도입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의 한 장면.

영화 <더 테러 라이브>의 한 장면. ⓒ (주)씨네2000


이 영화와 정치를 연결하고 있는 수많은 글, 글, 글들이 방증하듯, <더 테러 라이브>를 이끄는 앞-뒷바퀴는 테러범이 된 '못 가진 자' 박노규의 계급투쟁과 그가 사과를 원하는 '대통령'이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고문입니다. 이는 장르라는 거푸집에 정치적 요소를 맛깔나게 잘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송국이 상징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경찰청장이 상징하는 억압적 국가장치가 국민들의 안녕이 아닌 자신들의 영달과 청와대의 안위로 수렴하는 상황에서 박노규의 테러가 최하층민의 어쩔 수 없는 저항으로 묘사되고, 끝내 등장하지 않는 대통령은 한명의 국민이라도 우선으로 생각해야하는 대통령의 본분을 잊은 존재가 됩니다. 특히나 극의 시간적 배경이 MB정권으로 추측되는 증거들이 정서를 가중시키는데, 결국 마지막 폭파가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면서 국민을 생각하지 않은 국가권력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현재 흥행 선두를 달리는 <설국열차> 역시 계급투쟁을 담고 있기에 그 해석에 힘을 더 합니다. 영화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를 위시로 꼬리 칸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삶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경찰과 교육, 언론은 그런 꼬리 칸 사람들을 외면하고, 더 나아가 폭력을 행사합니다. 열차의 모든 존재들은 열차 안 절대 권력자인 윌포드(에드 헤리스 분)로만 수렴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기 위해 각 열차 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이에 꼬리 칸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반란(혹은 계급투쟁)이 일으키고, 결말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상징되는 열차를 폭파합니다.

자본주의를 붕괴시키고, 탈출하고. 서두에 밝혔던 것처럼 난형난제의 두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요 근래 대중에게 소위 먹히는 코드가 병든 자본주의 체제를 향한 불신이라 보입니다. 수치로만 따져도 두 영화를 찾은 관객을 합치면 1천만이 넘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해석이 마지막 퍼즐이라면 한 가지 물음이 남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10년 보수-신자유주의 정권을 뽑은 국민들이 왜 영화를 택했는가. 압도적인 두 영화의 스코어 앞에서 영화를 선택한 관객들과 지난 대선 당시 보수 정권에 투표했던 51.6% 유권자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10년 보수-신자유주의정권 앞에서 두 영화의 가장 올바른 정치적 해석은 극우 커뮤니티의 주장처럼 '더 좌빨 라이브'와 '좌빨열차'라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앞선 해석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해석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다만 영화라는 것이 감독의 품을 떠난 순간부터 더 이상 누구의 것이 아닌, 감독조차 의도하지 않은 전혀 다른 제 3의 존재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실제 <더 테러 라이브>를 향한 포털 사이트의 반응들을 보면 하정우로 시작해서 하정우 연기로 끝난다고 할 만큼 하정우만 이야기만 하고 있으며, 영화의 흠으로 결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앞의 물음은 '보수성향의 국민들이 두 영화에서 자신들의 정치성향에 반하는 부분을 왜 망각하는가'라는 물음과도 같다고 봅니다. 

이 물음의 답은 영화의 뒷바퀴에서 들리는 잡음에 있다고 봅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대통령이 올지도 모른다"라는 희망고문을 "왜 대통령은 오지 않았을까"라는 문장으로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의 안위 때문에? 즉 대통령이 직접 사과를 한들 박노규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없어서? 혹은 테러리스트에게 대통령이 사과를 한다는 것은 테러에게 패배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테러의 이유는 있지만 대통령 입장에 대한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빠른 편집과 긴박한 상황 연출은 그런 생각을 하게할 여유조차 주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대통령이 끝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정말 단순하게도 그래야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테러의 공포로부터 누구보다 빠르게 지하벙커에 숨는 겁쟁이 대통령의 모습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리분별 없이 테러리스트를 자극하는 경찰청장의 모습은 정치적 혐오가 그리는 '막연한 정치인'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이 영화가 먹히고 있다고 봅니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관객들 눈에 돋보이는 것은 그저 9·11 테러 당시 영화에서 볼법한 눈요기의 재연이며, 정치와 언론에 유린당하는 윤영화의 안타까움과 하정우 연기력입니다.

영화의 흥행은 정치적 불신에 기인하는 열망의 판타지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정치적 무관심의 반증으로 보입니다. 실시간 뉴스를 보듯, 또는 마포대교 붕괴라는 생경한 CG를 보듯, 관객은 차대은(이경영 분)이 시청률 78%를 찍었다며 좋아하던 그 78%의 시청자 중 한명일 뿐입니다. 

때문에 관객들이 결말에 반감을 갖는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왜 하정우가 그렇게 죽는지 모르겠다" "결말이 별로다" 과연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대로 박노규의 아들 박신우(이다윗 분)의 죽음을 신자본주의의 희생양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요. 아뇨, 관객들 눈에는 그저 하정우, 하정우, 하정우의 영화이기에 결코 윤영화는 기억해도, 박신우는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차곡차곡 쌓여온 정치적 정서가 박신우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마지막에 윤영화에 의해 터지는 결말이 되어야 하는 구조인데, 관객들 시선엔 박신우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상업화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러니 윤영화의 죽음은 불발탄이 되고 결말을 안 좋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국민들이 정치에 뜨겁게 관심을 갖고 반응했더라면 이 영화는 성공하기 힘들었다고 봅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끝없는 혐오가 존재하기 때문에 성공한 영화. 역설적으로 감독의 연출은 성공적이나 감독의 의도는 실패했기 때문에 성공한 영화가 아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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