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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의 약속> 훔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심은하·김희애와 겹치는 수애? 김수현표 드라마를 말하다

11.10.19 18:31최종업데이트11.10.1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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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새 월화드라마 <천일의 약속> ⓒ SBS


무림영웅들이 가고 쓸쓸한 가을 사랑이 찾아왔다. 하이라이트를 모아 '스페셜'로 종영한 SBS <무사 백동수>가 실질적으로 마지막 방송이었던 지난 10일 19.7%(이하 AGB닐슨리서치 수도권 기준)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뒤이은 새 월화드라마 <천일의 약속>은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를 포함, 퓨전 장르가 강세인 최근 드라마 흐름 속 보기 드문 '정'통 멜로다.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주인공이 약혼녀 있는 남자를 사랑하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말만 들어도 고리타분한 '전'통 멜로.

하지만 김수현 대본에 정을영 PD의 연출이 더해진 멜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불꽃><내 남자의 여자><엄마가 뿔났다><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이미 검증된 두 사람의 호흡과 작품 흥행은 그 흔한 멜로도 남다른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앞으로 예고된 두 사람의 운명과 달리 <천일의 약속>은 17일 14.7%로 순조롭게 출발해 2회 17.3%로 뛰어올랐다.

김수현 대본 정을영 연출 드라마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불꽃><내 남자의 여자><엄마가 뿔났다><인생은 아름다워>. ⓒ 관련 공식홈페이지


비겁한 그와 초라한 그녀 '천일의 약속'



약혼녀와 파혼할 자신도 없으면서 지형(김래원 분)은 서연(수애 분)을 사랑한다. 그의 결혼 전까지 훔친 사랑인줄 알고도 서연 역시 지형을 사랑한다. 지형의 결혼 날짜가 잡히면서 둘은 이제 사랑'했다'로 남아야 한다. 비겁해서 미안하다는 남자, 초라해서 미안하다는 여자.

아무리 가을 순애보라지만 첫 회를 두 사람의 이별로 시작하다니.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의 결혼 전까지만'이라는 전제로 시작한 사랑, 두 사람이 놓인 설정부터 쓸쓸한 비극이다. 물론 <천일의 약속>에도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올려다 본 여자, 자식의 행복 따윈 관심 없는 부모의 아들인 남자라는 너무도 흔해빠진 설정이 등장한다. 그것들로 인해 이들의 사랑이 방해받으니 자칫 신파처럼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연은 "일찍이 애어른이 되었고, 미운 군식구가 되지 않으려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자기 보호색일까, 명랑, 쾌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시크한 도시형 '캔디'고, 지형은 "나이도 어렸고 환경의 차이도 걸림돌이었고, 자기 감정에 대한 확신도 미지수"인 유약한 '테리우스'이지 않은가.

SBS 새 수목드라마 <천일의 약속>2회 중. ⓒ SBS


첫 회에 이별했지만 각자의 삶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회상하는 사랑했던 나날들을 통해 시청자는 단 2회 만에 이들의 '후회 없는 사랑'에 충분히 공감한다. 오히려 약혼녀와의 결혼 준비에 끌려 다니는 지형을 보며 답답함보단 안쓰러움이, 예정된 이별 앞에서 자신의 특기인 '보호색'으로 슬픔을 감추려는 서연에겐 훔친 사랑에 대한 질타보단 동정이 앞선다.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에서 비롯된 지지부진한 역경의 과정, 이별 그리고 재회'라는 기존 멜로 드라마의 공식이 아닌, 이별부터 시작된 의외의 스토리 라인과 서연의 병을 암시하는 몇몇 복선과 첫 회에 등장한 예상 밖의 빠른 전개가 <천일의 약속>이 신파 설정을 가졌음에도 신파가 아니게 만든다. 비겁한 그와 초라한 그녀라는 신파적 요소는 <천일의 약속>이 보여주려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위한 장치일 뿐이다.      

'김수현의 여자' 김희애가 수애에게서 보인다

김수현 작가 드라마의 히로인 김희애, 심은하와 <천일의 약속> 여주인공 수애. ⓒ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가진 게 너무 많아 비겁할 수밖에 없는 남자 지형의 결혼까지, 기한이 정해진 도둑 사랑을 한 '가진 건 자존심밖에 없는 여자' 서연을 연기하는 수애에게서 그간 '김수현 드라마' 히로인들의 모습이 겹친다. 당차지만 비운의 사랑 앞에선 미어오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우는 모습에서 <완전한 사랑>의 영애(김희애 분)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미련 없는 척 일부러 '쿨한 척' 하는 모습에서 <청춘의 덫> 속 표독스러워진 윤희(심은하 분)를 떠올린다. 거기에 김수현 작가 전작이 그렇듯 결국 지고지순한 순애보 이야기임에도 맑고 곱게만 그려내지 않는 특유의 필력이 <천일의 약속>에도 닿아 있어, 수애가 연기하는 서연은 새로운 '서연'이 아니다. 서연은 영애이자, 윤희이며 이름만 다른 김수현의 '여자'다.

그런 의미에서 수애가 김수현의 여자를 연기하는 새로운 얼굴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천일의 약속>은 수애가 심은하, 김희애를 잇는 김수현의 히로인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평범하고 싶지만 결혼할 여자가 있는 남자에게 거침없이 내달릴 만큼 가슴 속에 불을 안고 있는 서연을 주문하는 김수현의 요구에 제작발표회에서의 수애는 "벌써 이서연이 된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몰입하고 있다.

<천일의 약속>에서 약혼녀가 있는 지형과 이룰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기억을 잃어가는 서연 역을 맡은 수애. ⓒ SBS

하지만 명실상부 김수현의 뮤즈는 김희애인걸까. 서연을 연기하는 수애의 모습에서 김수현 전작 <내 남자의 여자> 속 화영을 연기한 김희애가 겹친다. 이는 앞서 말한 김수현이 그려내는 극 중 여자들을 관통하는 성격때문만은 아니다. 약혼녀가 있는 지형을 유혹하는 설정이 <내 남자의 여자> 속 화영과 닮아있기 때문도 아니다. 화영을 연기한 김희애의 표정과 억양, 목소리 톤이 수애의 연기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특유의 저음과 다소 여유있는 템포의 수애 본연의 목소리 대신, 격정적인 신 속에서 종종 발견되는 김희애의 목소리를 발견했다면 억측일까. 김수현 작가 특유의 말맛을 소화해내야 하는 부담이 있겠지만, 수애가 만들어내는 서연으로 김수현의 여자를 만나고 싶다.  

시청자까지 대본에 밑줄 긋는 연습 시키는 김수현 드라마

"지구가 깨지네요."
"아버진 우주가 무너져."

약혼자 말고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그래서 파혼하고 싶음을 어머니에게 말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지형과 아들의 진짜 사랑 고백을 딱 잘라 거절하는 그의 엄마(김해숙 분)의 대화다. 둘은 이전부터 갈등이 고조되는 대화를 핑퐁 주고받듯 맞받아쳐왔다. 팽팽해지는 감정의 긴장만큼이나 대화 속 대사 주고받음의 긴장감도 만만찮다. 일상에서 이런 순발력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장담컨대 불가능하다. 이것은 김수현 드라마에서만 통하는 말맛이자 특유의 속도감 있는 대사처리다.

혹자는 이 대화체 때문에 김수현 드라마가 셰익스피어나 체홉 같은 고전 비극 무대를 보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장황하지만 결코 늘어지지 않는, 일목요연하면서도 어디에 방점이 찍혀있는지 귀로 흘러지나가는 말 속에서 파악이 가능한 대사. 오히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대화체이기 때문에 드라마임을 뚜렷이 각인시키는 이 대사 속에 김수현 작가는 끊임 없이 그 인물을 투영한다. 그가 살아온 삶과 그 안에 켜켜이 쌓여 있을 철학을, 갑자기 한 인생의 중간에 들이닥친 시청자가 몇 마디 대사만으로 다 파악할 수 있게끔 말이다. 그래서인지 김수현 드라마는 연기자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대본 그대로 대사를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편의 소설을 본 듯한 영화나 TV 드라마처럼 종종 영상이지만 텍스트가 읽히는 작품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김수현 드라마를 꼽는다. 하지만 그 안에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김수현 특유의 말맛과 대사 철학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치열한 고민과 극중 인물의 인생을 함축한 대사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시청자까지 대본에 밑줄 긋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대사를 달달 외워야 하는 연기자 보다 더한 형광펜 밑줄을 시청자가 긋게 만든다고.      

SBS <천일의 약속> 포스터 ⓒ SBS


<천일의 약속>의 슬픔은 회를 거듭할수록 깊어질 것이다. 이별 후유증 같아 보이던 서연의 잦은 두통과 건망증이, 실은 알츠하이머병을 예견하는 기억상실이었음이 드러난 2회만 봐도 그렇다. 어려서부터 불운했고 닥쳐올 미래까지 비극인 서연과 한정된 기억 속에 그들의 사랑을 밀어 넣고자 애쓸 지형의 사랑이 <천일의 약속>의 핵심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아마 천일이리라. 이제 막 시작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다 같이 느껴보자.

천일의 약속 수애 김래원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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