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약속>에서 약혼녀가 있는 지형과 이룰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기억을 잃어가는 서연 역을 맡은 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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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실상부 김수현의 뮤즈는 김희애인걸까. 서연을 연기하는 수애의 모습에서 김수현 전작 <내 남자의 여자> 속 화영을 연기한 김희애가 겹친다. 이는 앞서 말한 김수현이 그려내는 극 중 여자들을 관통하는 성격때문만은 아니다. 약혼녀가 있는 지형을 유혹하는 설정이 <내 남자의 여자> 속 화영과 닮아있기 때문도 아니다. 화영을 연기한 김희애의 표정과 억양, 목소리 톤이 수애의 연기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특유의 저음과 다소 여유있는 템포의 수애 본연의 목소리 대신, 격정적인 신 속에서 종종 발견되는 김희애의 목소리를 발견했다면 억측일까. 김수현 작가 특유의 말맛을 소화해내야 하는 부담이 있겠지만, 수애가 만들어내는 서연으로 김수현의 여자를 만나고 싶다.
시청자까지 대본에 밑줄 긋는 연습 시키는 김수현 드라마"지구가 깨지네요." "아버진 우주가 무너져."약혼자 말고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그래서 파혼하고 싶음을 어머니에게 말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지형과 아들의 진짜 사랑 고백을 딱 잘라 거절하는 그의 엄마(김해숙 분)의 대화다. 둘은 이전부터 갈등이 고조되는 대화를 핑퐁 주고받듯 맞받아쳐왔다. 팽팽해지는 감정의 긴장만큼이나 대화 속 대사 주고받음의 긴장감도 만만찮다. 일상에서 이런 순발력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장담컨대 불가능하다. 이것은 김수현 드라마에서만 통하는 말맛이자 특유의 속도감 있는 대사처리다.
혹자는 이 대화체 때문에 김수현 드라마가 셰익스피어나 체홉 같은 고전 비극 무대를 보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장황하지만 결코 늘어지지 않는, 일목요연하면서도 어디에 방점이 찍혀있는지 귀로 흘러지나가는 말 속에서 파악이 가능한 대사. 오히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대화체이기 때문에 드라마임을 뚜렷이 각인시키는 이 대사 속에 김수현 작가는 끊임 없이 그 인물을 투영한다. 그가 살아온 삶과 그 안에 켜켜이 쌓여 있을 철학을, 갑자기 한 인생의 중간에 들이닥친 시청자가 몇 마디 대사만으로 다 파악할 수 있게끔 말이다. 그래서인지 김수현 드라마는 연기자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대본 그대로 대사를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편의 소설을 본 듯한 영화나 TV 드라마처럼 종종 영상이지만 텍스트가 읽히는 작품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김수현 드라마를 꼽는다. 하지만 그 안에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김수현 특유의 말맛과 대사 철학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치열한 고민과 극중 인물의 인생을 함축한 대사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시청자까지 대본에 밑줄 긋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대사를 달달 외워야 하는 연기자 보다 더한 형광펜 밑줄을 시청자가 긋게 만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