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용서한 것같이(2008) 이웃사촌을 적으로 만든 르완다 사태, 그들이 다시 화해와 용서를 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우리가용서한것같이
르완다에는 3개 부족이 살고 있었다. 다수종족인 후투족, 소수종족인 투치족, 피그미족처럼 숲속에 사는 트와족이 그들이다. 투치족 국왕의 통치 아래 수세기 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던 이 나라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독일과 벨기에의 식민지배 이후이다.
지배자였던 벨기에인들은 각 종족들을 차별하면서 인위적으로 계급사회를 만들며 기존 사회구조를 바꾸어 버렸다. 소수종족인 투치족들은 지배계급으로 선택되었고, 이들에게만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다. 자국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어가기 위해 차별대우를 시작한 것이다. 벨기에인들은 종족간 구별을 더 쉽게 하기 위해 급기야 종족별 신분증까지 만들었다.
억지로 갈라놓은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은 이로 인해 그 골이 더욱 깊어졌다. 벨기에인들의 무모한 종족차별정책은 후투족의 마음에 증오심을 심어주었다. 훗날 벌어질 대학살의 원인은 이미 이때부터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벨기에인들은 나중에 투치족이 독립을 요구하자 단번에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고, 1959년에는 후투족의 유혈폭동을 사주하여 투치족의 왕정을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이때 단 며칠 만에 10만이 넘는 투치족들이 보복이라는 이름 아래 살해되었다. 벨기에가 르완다에서 손을 뗀 1962년에 후투족 정부가 들어서자 투치족은 완전히 2등 국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후투족 정부는 벨기에인들이 고안한 종족별 신분증을 더욱 알아보기 쉽게 만들었다. 후투족 과격파들은 처형과 폭력으로 수십만을 학살했으며, 이로 인해 폭력은 더욱 악순환하게 되었다. 종족차별은 더욱 더 깊이 뿌리 내렸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투족 대통령 주베날 하비아리마나는 1973년 급기야 '종족균형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이것은 학교에서 학생을 받을 때나, 정부에서 공무원을 뽑을 때, 실제 종족간의 구성비율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르완다는 85%에 달하는 후투족, 14%의 투치족, 그리고 1%에 불과한 트와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고등교육과 공직의 기회는 대부분 후투족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호텔 르완다(2004)> - <쉰들러 리스트>의 아프리카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