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
유니버설 픽쳐스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를 설명하며 '즉자 존재(être-en-soi)'와 '대자 존재(être-pour-soi)'를 구분한다. '즉자 존재'는 자기 안(en)에 빠져있는 상태고 '대자 존재'는 자기에 대해(pour) 반성과 지각이 있는 상태이다.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아노라는 '즉자 존재(être-en-soi)'에서 '대자 존재(être-pour-soi)'로 각성한다. 물론 자발적 각성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최종심급인 돈에 아노라가 철저하게 복속된 상태고 기적 같은 기회를 활용해 어떻게든 부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본의 철옹성과 계급의 벽은 아노라 같은 하층민에게 결코 돌파를 허용하지 않는다.
기적 같이 찾아온 기회에서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비자발적 배제를 겪으며 자신의 존재와 정면으로 대면한 아노라가, 오염돼 못 쓰게 된 자아의 불쾌한 껍질을 하나씩 걷어낸다. 영화는 이런 탈피를 우화(寓話)로 보여준다. 갖지 못한 자에게 존재의 존엄이라는 건 사실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냥 갖지 못한 자가 아니라, 아노라처럼 인생의 바닥으로 밀려 몸만이 자산인 계급에는 존재의 존엄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다. 존재의 존엄을 성찰하기보다 생존의 엄중을 각성하는 데 급급하다.
가진 자의 일원이 될 기회를 거머쥐었다가 다시 갖지 못한 자로 전락할 때 그 전락에서 존엄의 섬광을 목격하곤 나름의 존엄성을 깨닫는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각성이 더 치열해진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 역설에서 깨닫는 존재의 존엄은 가진 자들이 말하는 존재의 존엄과 다르다. 그 존엄은 존재의 절벽에서만 목격되는 단층 같은 것이어서 추락할 때만 목격할 수 있다. 실존의 관점에서는, 존재의 공허를 휘저어 존엄을 끌어낸 것이기에 더 고양된 존엄이라고 말해야 한다. 부엌데기가 신데렐라가 돼 그 상황에 머물렀으면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고양이다.
사랑
사랑에서도 비슷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은 사랑의 당사자가 '즉자 존재'를 벗어나 '대자 존재'가 되며 시작한다. 고정적 자아에서 열린 자아로 바뀌어야 사랑할 준비가 된다. 나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 내 안(en)의 고립에서 탈출해 나를 누군가를 위한(pour) 존재로 탈바꿈할 준비를 해야 사랑에 뛰어들 수 있다.
사랑은 실존과 비슷하다. 대자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반합의 과정을 겪지는 않는다. 나에서 고양된 또 다른 나로 가는 변증법의 전개로는 사랑을 설명할 수 없다.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나를 벗어나려는 몸부림과 사랑이 결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