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 애프터> 스틸컷
넷플릭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 <페이퍼보이 : 사형수의 편지>(2013), <버틀러 : 대통령의 집사>(2013), <모스트 바이어런트>(2015) 등 배우 데이빗 오예로워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영화는 여럿이지만 역시 <셀마>(2015)의 마틴 루터 킹을 빼놓을 수는 없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바탕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흑인 인권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추앙받는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그 존재감이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역사의 한편을 짊어질 수 있는 배우에게는 분명 특별한 무엇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작품들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전기 영화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인지 모른다. 주연이 아닌 조연을 맡았던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우간다의 악명 높은 독재자 이디 아민을 그려낸 <라스트 킹>(2006), 전설적인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의 일대기를 담은 <니나>(2016)와 같은 영화가 여기에 속한다. 전기물이 쏟아지던 2010년대 중후반의 시대적 분위기도 분명 영향을 줬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여러 작품에서 서로 다른 인물을, 그것도 영화의 전면에 세워져 소비되었음에도 그의 이미지가 한 번도 혼동되거나 뒤섞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극영화에서도 그의 존재감이 희석되지는 않는다. 장르도 꽤 다양한 편이다.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2002)라는 코미디 장르의 작품이었다. 교도소 내에서 오페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았다. <모스트 바이어런트>(2015)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드라마 장르에 뛰어들기 시작한 그는 <파이브 나이츠 인 메인>(2015)에서는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인물을 연기했고, <오직 사랑뿐>(2018)에서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컴어웨이>(2022)를 통해 판타지 장르까지 영역을 확장한 그의 다재다능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영화 <디 애프터>는 그런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자신의 연기 하나만으로 극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단단한 배우의 내공이다.
02.
영화 <디 애프터>는 한 남자(데이비드 오예로워 분)와 그의 딸 로라(아멜리 도쿠보 분)의 행복한 모습으로 시작된다. 공유 차량을 운전하고 있는 그는 할당된 업무로 인해 지난 몇 주간 아이가 열심히 준비한 공연에 참석하지 못할 예정이다. 로라도 아빠의 그런 사정을 아는 모양. 엄마 아만다(제시카 플러머 분)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만난 공원 한구석에서 오늘 공연에서 선보일 춤을 아빠에게 보여준다. 충만한 사랑과 애정으로 반짝거리는 오프닝 신. 느닷없이 찾아온 행복은 종종 쉽게 깨져버리곤 한다. 프레임을 깨뜨리며 등장한 괴한의 공격. 남자는 딸과 아내를 순식간에 잃고 만다. 환한 대낮에, 확 트인 공원에서,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이제 영화의 제목이 가진 뜻을 알 것 같다. 남자가 지금 처한 모습, 앞으로 살아가게 될 날들을 함축적이지만 직관적으로 담은 표현이다. 이제 남는 것은 시작점에서 천명하듯 밝힌 작품의 목적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물론 그 중심에는 예상하지 못한 상실, 가장 행복해야 했을 순간에 끔찍한 비극을 맞이한 남자, 그를 연기한 데이비드 오예로워가 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한번 자신의 목적에 온점하나를 찍는다. 런던 중앙 형사 법원에서 나온 살인 사건의 유죄 판결, 흉기를 휘두른 남자로 인해 네 명이 사망하고 여럿이 다친 사건에 대한 평결을 발표하면서다.
그동안 시간이 조금 흐르기는 했지만, 가족의 형태와 그 형상이 간직하고 있던 온기를 한순간에 빼앗아버린 날에 대한 세상의 판단은 어떻게든 매듭지어진다. 남자의 오늘과는 다르다. 그날 이후 남자가 가족을 기억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겨진 녹음 메시지로 가족의 목소리를 반추하는 일과 닿지 않는 사진 속 얼굴을 매만지며 촉각을 꼿꼿이 세우는 일이다. 여전히 존재의 부피를 키우는 것은 슬픔과 절망뿐. 눈물이 계절의 수확물처럼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