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의 황혼"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엣나인필름
바람 잘 날 없는 스기야마 씨네 사정
1950년대 중반 동경의 겨울 어느 날, 영화가 시작된다. 은행의 중역 스기야마 씨 가족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제각기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중이다.
스기야마 씨에겐 두 딸이 있다. 큰딸 타카코는 문학 교수이자 번역가인 누마타와 결혼해 딸 미치코를 낳았다. 작은딸 아키코는 아직 결혼하지 않고 스기야마 씨와 한집에서 산다. 아키코는 대학을 중퇴하고 속기사 과정을 배우는 중이라 하지만, 취업이나 결혼이나 양쪽 모두 크게 집중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특이하게 '아내'이자 '엄마'의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스기야마 씨가 퇴근하자 타카코가 아버지를 맞이한다. 외손녀 미치코도 집에 와 있다. 인사를 받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큰딸은 당분간 누마타에게 돌아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기를 청한다. 겉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근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자주 화를 내는 남편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를 허락하고, 사위를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아키코는 자주 외출해 늦게 돌아오기 일쑤다. 가족과 친척들은 이를 근심하며 좋은 혼처를 물색하는 중이다. 하지만 정작 아키코는 뭔가에 홀린 듯 방황한다. 그는 '겐조'란 남자를 찾아 동경의 거리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지만, 상대는 통 나타나지 않는다. 아키코가 이르는 곳마다 겐조와 아키코의 관계를 아는 이들은 숙덕거리며 도움을 줄 생각은 통 보이지 않는 대신, 아키코를 비아냥거리며 가십 거리로만 삼는다.
실은 아키코는 겐조와의 사이에서 혼전 임신을 한 상황이다. 덜컥 겁이 난 그는 겐조와 상의하려 하지만, 대학생 한량 겐조는 아무래도 일부러 골칫거리를 회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키코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가족 몰래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기저기 자금을 빌리러 다니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처럼 멀지 않아 스기야마에게 소문이 들려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가족은 얼른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면 해결되리라 기대할 따름이다.
겐조를 찾아 그가 들를 곳을 헤집고 다니던 아키코는 자신은 물론 가족과 잘 안다며 옛날 이웃이라 밝히는 중년 여성을 만난다. 하지만 작은 도박장 안주인이 이웃일 리 없다며 이상하게 여길 뿐이다. 아키코는 그 여자가 말하는 고향에서 유년 시절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현재 마음 한구석 공허함의 근원이기도 하다. 여자는 이후로도 스기야마 가족과 계속 엇갈린다.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급변하는 일본 사회와 가족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