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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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서 중국인 양가휘와 맺은 관계가 프랑스 소녀에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끊임없이 유발한다. 소녀는 이 관계에서 상대를 호명하지 않고 홀로 자신을 계속 태울 뿐이다. 양가휘도 마찬가지로 그 갈증에 시달리면서 내면에서 고통을 불러낸다. 둘은 감히 상대에게 눈을 돌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고통의 작가라고 하는 뒤라스의 관점이 영화에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시대 배경을 따져보면 고통과 갈증의 관계는 이들이 경계인인 데서 비롯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가난한 백인 소녀와 베트남의 중국인 대자본가의 아들이 만난다. 제인 마치뿐 아니라 양가휘도 경계에 서 있는 존재이다. 영화에서 몇 차례 언급되듯 그는 베트남 남자가 아닌 중국인 남자다. 당연히 프랑스 남자도 아니다. 두 사람 모두 본향을 떠나서 '경계례'(Borderline Case)로 서로를 만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가 메콩강을 건너는 배 위였다는 사실이 경계례를 시사하는 근원적 풍경이다. 이들의 사랑은, 이방인이 아니지만, 이방인이 아닌 것도 아닌 '유사' 이방인끼리의 사랑이 된다.
제국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프랑스 등 본국에서 식민지로 나가는 사람 대부분은 본토의 과잉 인구였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폭민으로 표현한 이 사람들은 본토에서 환영받지 못하다가 식민지가 생기면서 그리로 밀려 나간다. 본토에서 쓰레기였지만,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들에게 엄청난 기회가 생긴다. 피부색, 즉 피 때문에 우월성을 주장할 상황이 주어지지만, 식민지에서도 피보다 돈이 더 강력했다. 제인 마치 집안이 프랑스인으로 내세울 우월감이 가난으로 사라져 버린다.
자본의 과잉이 국경을 무너뜨린 제국주의 시대에서 하얀 색깔의 인간이 하얀 색깔의 백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과잉 자본에 연루되어야 하는데 제인 마치가 연기한 주인공 소녀는 같은 백인에게 사기당해 곤궁한 지경으로 몰린 집안의 딸이어서 우월성을 상실한 상태이다. 경계 끝에 몰린 프랑스 소녀가 조우한, 베트남에 자리 잡은 화교 집안의 아들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예정이지만,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 프랑스와 베트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주변인이다. 그의 우월성은 부(富)이지만, 뿌리가 취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두 사람은 경계에 있는 사람이고, 여기에서 비롯한 절박함과 위기감, 주변화의 공포를 내재화한 가운데 사랑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서로를 끌어당기고 그리하여 사랑에서 부수적으로 모종의 존엄 같은 것을 확인하려 든다. 제인 마치가 인정하듯 본질상 창녀, 좋게 보아 정부로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기에 이 확인은 성공하지 못한다. 양가휘 또한 사랑의 감정을 확신하면서도 상대를 정부 이상으로 만들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갇히기에 마찬가지로 확인이 성공하지 못한다.
카타르시스 없는 사랑?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원작 소설을 "카타르시스 없는 소설"로 평가했다. 원작 소설이 기본적으로 누보로망이기에 이러한 평가가 불가피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근거하면 작품의 플롯, 연민과 공포가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연민과 공포는 독자 또는 관객의 몰입을 전제한다. 대상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작품 속 타자의 상황을 통해서 얻는 기쁨이나 정화작용 같은 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는데 원작 소설에서 연민과 공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크리스테바가 말한 대로 카타르시스의 작동이 불가능할 수 있어 보인다.
누보로망인데다 자서전과 픽션을 넘나드는 구조가 더해져 대상화든 동일시든 서사든 이런 것들이 흐지부지되어 연민과 공포든, 카타르시스든, 전통적 소설의 효과를 무력화한다.
자신에서 벗어나진 않으니까 계속 자기 안에서 타들어 가는 구조다. 이 구조는 사랑하기를 사랑했다는 대상화 없는 주체 내의 무한 침잠을 뜻한다. 거기서 주체가 참조할 수 있는 타자는 거울밖에 없다. 그래서 거울을 보게 되지만, 문제는 거울 속에 비친 상이 타자인지 자신인지마저 헷갈리게 된다는 데에 있다. 뒤라스를 고통의 작가라고 하는 이유를 이 고통의 구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