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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채식주의자'는 어쩌다 '포르노'가 됐나

[리뷰] 2024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맞춰 재개봉한 영화 <채식주의자>

24.10.22 20:26최종업데이트24.10.2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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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암초(暗礁) 같은 책이다. 얼핏 읽어서는 의도를 알 수 없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조차 수면 위를 겉돈다. 그러니 화자의 말만 믿고 따라가면, 깊은 곳에 숨은 작가의 의도를 발견하지 못해 좌초할 수 있다. 한강은 2016년 KBS < TV, 책을 보다 >에서 "책 속 화자는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내가 그편에 서서 옹호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이들이 빗나가는 과정을 따라가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 세 명의 화자에 의해 서술된다. 그들은 폭력적인 시선으로 영혜를 몰이해하고, 자신을 옹호한다. 화자의 눈으로만 영혜를 바라보면 그는 그저 '이상하고 문란한' 여성에 불과하다. 또한 저변에 숨은 폭력성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이 책을 '야한 소설'이라 생각할 수 있다.

2010년 개봉한 영화 <채식주의자>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맞춰 2024년 재상영됐다.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원작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작에 모욕적인 수준이다", "비판 의식을 포르노처럼 묘사했다" 등 일부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는 화자의 시선에만 충실했다. 절반을 성관계 장면에 썼고, 모든 인물들이 납작해졌다. 육욕(肉慾)을 떨구지 못한 영화가 내뱉는 신음만 귀에 남았다.

영혜는 갑자기 '미친' 여자가 아니다

 영화 <채식주의자> 스틸컷
영화 <채식주의자> 스틸컷블루트리 픽쳐스

한강의 말에 따르면 영혜는 '폭력성을 밀어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그가 밀어내고자 하는 폭력성은 어디에 있는가? 주변 인물 안에 있다. 가전제품 고르듯 영혜를 선택한 남편, 키우던 강아지로 보신탕을 끓이는 아버지, 가부장제가 주는 폭력에 순응하는 언니와 예술 작품처럼 영혜를 욕망하는 형부까지.

폭력에 무감한 주변 인물들에 질려하며, 동시에 그런 자신도 폭력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영혜는 극단적인 채식주의를 선택한다. 중요한 건 영혜가 아닌 주변 인물들이 '화자'라는 점이다. 책은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하고, 아무렇지 않은 인물의 시선으로 영혜를 바라본다. 그렇기에 독자는 화자의 서술을 거부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영혜를 읽어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어쩌다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천천히 폭력성에 스며들다가 마침내 자기 파괴적 행위를 하게 되는 원작과 달리 영화 속 영혜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갑자기 채식과 자연에 홀린다. 느닷없이 채소 쌈을 고집하고, 하루아침에 가족들을 무시하는 영혜는 폭력성에 저항하는 사람보다 신경질적이고, 이상한 여성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영화는 영혜가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에만 집중한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남편은 영혜를 돌보다가 지치고, 성관계까지 거부당하며 불만족스럽게 산다. 언니는 일과 육아를 도맡으며 아픈 영혜까지 돌보느라 힘들다.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차린 잔칫상에서 고기가 싫다는 딸의 투정을 들어야 한다.

영화는 마치 까다로운 영혜가 주변 인물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남편, 언니, 다른 가족의 힘듦에 이입한다. 카메라가 집중하는 건 영혜가 아니다. 영화는 완강하게 거부하는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는 다른 가족의 마음을 묘사하는 듯 보인다. 결국 관객은 영혜를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가족에 대항하고자 자해하는 그의 행동을 더욱 납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 특히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강아지를 죽였던 회상 장면은 자세하게 다룬다. 맞으면서 내뱉는 어머니의 신음, 죽어가는 강아지의 숨소리를 지나칠 만큼 생생하게 들려준다. 해당 장면은 폭력 그 자체를 폭력을 향한 사유로 확장되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을 관조하는 데 쓰일 뿐이다.

영혜는 '야릇한' 여자가 아니다

 영화 <채식주의자> 스틸컷
영화 <채식주의자> 스틸컷블루트리 픽쳐스

영화가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한 건 영혜와 형부 '민호'의 관계다. 예술가인 민호가 제안한 나체 작업이 성관계로 이어졌고, 둘은 그 상황을 언니에게 들킨다. 원작에서도 영혜와 민호의 관계를 두고 독자들의 평이 분분했다. 영혜는 왜 민호와 성관계를 한 것일까? 성적 욕망인가, 정신 착란인가. 그것도 아니면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는가.

이에 대해 한강은 2016년 대담 <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에서 "이 소설이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주인공은 끝까지 말하지 않고 미끄러져 도망치다 보니까 모두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된 것"이라 답했다. 그만큼 둘의 관계 속에서 영혜의 입장을 정의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민호가 영혜를 예술 작품 혹은 내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다는 점은 분명히 독해할 수 있다.

영화는 민호의 관음증적 시선을 그대로 따른다. 성인이 되어서도 몽고점이 있다는 말에 영혜의 몸을 낱낱이 보며 그 너머를 떠올리고, 영혜의 나체를 상상하며 성적인 그림을 그리고, 결국 세 번이나 나체 상태인 영혜를 촬영하는 과정을 모두 민호의 시점에서 묘사한다. 그 과정에서 영혜는 완전히 성적 대상화된다. 전반부에서 영혜가 주변 가족들을 괴롭히는 '이상한' 여자였다면, 후반부에서는 '야릇한' 여자가 된다.

 영화 <채식주의자> 포스터
영화 <채식주의자> 포스터블루트리 픽쳐스

카메라는 영혜의 야릇한 모습을 거듭 보여준다. 민호가 자신의 몸에 그림을 그리자 얼굴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곱아들고, 신음을 내는 영혜를 비추거나 민호의 후배와 함께 촬영할 때는 포르노적 구도를 즐기는 듯한 표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민호의 요구에 맞춰 무기력하지만, 기꺼워하는 표정으로 나체 작업과 성관계를 행하는 영혜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민호의 시선을 따라간 영화는 마지막 장면까지 영혜를 성적인 존재로 바라본다. 영혜는 '나무들은 모두 두 팔로 땅을 짚고 있다'며 물구나무를 선다. 그러나 화면은 바닥을 짚은 두 팔 대신에 줄기처럼 벌어진 영혜의 다리 사이에 집중한다.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표현한 영혜는 인간의 폭력성에 발버둥 치는 인간이다. 가부장제에 말라비틀어진 여성이 폭력을 당하기도, 행사하기도 싫어 기어코 '나무'의 꿈을 꾸는, 자기 파괴이자 자기 구원 소설이다.

이런 한 인간의 가여운 투쟁을 영화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몸을 훑으며, 영혜를 탐하는 이의 눈에 집중하며, 영혜를 성적 대상화로 풀어내는 데 그쳤다. 폭력의 입체성을 삭제하고, 되려 폭력을 선정적인 측면으로 다룬 영화 <채식주의자>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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