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암초(暗礁) 같은 책이다. 얼핏 읽어서는 의도를 알 수 없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조차 수면 위를 겉돈다. 그러니 화자의 말만 믿고 따라가면, 깊은 곳에 숨은 작가의 의도를 발견하지 못해 좌초할 수 있다. 한강은 2016년 KBS < TV, 책을 보다 >에서 "책 속 화자는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내가 그편에 서서 옹호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이들이 빗나가는 과정을 따라가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 세 명의 화자에 의해 서술된다. 그들은 폭력적인 시선으로 영혜를 몰이해하고, 자신을 옹호한다. 화자의 눈으로만 영혜를 바라보면 그는 그저 '이상하고 문란한' 여성에 불과하다. 또한 저변에 숨은 폭력성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이 책을 '야한 소설'이라 생각할 수 있다.
2010년 개봉한 영화 <채식주의자>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맞춰 2024년 재상영됐다.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원작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작에 모욕적인 수준이다", "비판 의식을 포르노처럼 묘사했다" 등 일부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는 화자의 시선에만 충실했다. 절반을 성관계 장면에 썼고, 모든 인물들이 납작해졌다. 육욕(肉慾)을 떨구지 못한 영화가 내뱉는 신음만 귀에 남았다.
영혜는 갑자기 '미친' 여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