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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IMF의 진실, 아쉬운 건

[김성호의 씨네만세 851] 16회 DMZ국제다큐영화제 < 1997 >

24.10.14 15:01최종업데이트24.10.1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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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있기까지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을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을 들겠는가.

많은 답이 나올 수 있을 테다. 혹자는 한국전쟁을, 또 누구는 4·19 혁명을, 다른 이는 80년 광주 민주화항쟁이나 87년 6월 항쟁을, 심지어 2016년 촛불혁명을 꼽는 이도 있을 수 있겠다. 누가 내게 이 질문을 한다면 나는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빼놓아선 안 된다고 답하리라. 이 사건이 그저 외환보유고나 IMF라는 국제기관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이가 하나 더 있다.

그의 이름은 태준식이다. 1971년생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한 영상 기록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이야기를 담은 <어머니>, 조선일보를 위시한 소위 보수언론의 실체를 파헤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한 <슬기로운 해법>이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10여 년간 제작에 골몰할 뿐 직접 연출작을 내놓지 않았던 그가 오랜만에 신작을 발표했다. 한국 다큐인 이라면 누구나 존중하는 대표적 행사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서다.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베리테' 섹션을 통해서다.

 영화 < 1997 > 스틸컷

영화 < 1997 >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잊혀져가는 진실을 발굴하다

불어로 '진실'을 뜻하는 베리테(Verite)는 특히 영화예술과 맞물려 그 제작과 촬영, 또 해석에 있어 거짓을 걷어내고 진실에 접근하는 모든 노력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여왔다. 그 베리테를 섹션명으로 내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측은 이와 관련해 '진실의 가치를 추구하고 주장하는 다큐멘터리의 본원적인 의미, 그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과 시도, 무엇보다 헌신을 주목하고 기념하는 섹션'이라며 '다큐멘터리스트들의 눈을 통해 동시대 한국과 세계의 시사를 폭넓게 지도 그릴 수 있는 섹션이기도 하다'고 자평한 바 있다.

태준식의 신작 < 1997 >은 진실된 방법으로 사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중에서도 특별히 '베리테' 섹션으로 구분될 만큼 특징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1997년 있었던 대사건, 즉 IMF 외환위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영화제 측이 < 1997 >을 이 섹션에 포함한 건 그간 한국사회에서 파묻혀 드러나지 않던 진실의 일부에 감독이 적절히 가 닿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 1997 >은 시민단체 정보공개센터가 IMF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문서를 받아낸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IMF 외환위기가 한국 경제와 산업, 금융의 체질을 완전히 뒤바꾸고, 향후 한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내부 문건을 확보해 정리하는 건 그저 어느 시민, 또 시민단체의 업무만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와 같은 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정보공개센터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영화는 그 일의 가치에 깊이 공감한 감독이 이를 바탕으로 IMF 외환위기의 내밀한 이야기를 소환해 설명하는 작업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고, 아는 사람은 충분히 아는 주제일 수 있겠다. IMF 외환위기는 그 중요도에 비해 한국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는 탓이다. 왜 아닐까. 실제 몇 년 전 초등학교 사회과 교사용 교과서에 IMF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국민들이 외제 차를 사고 해외여행을 다니는 등 사치풍조가 만연한 사실이 명시됐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실제 영화가 끝난 뒤 GV자리에서도 1997년을 전후해 태어난 세대가 이와 같이 배웠다고 증언해 충격을 던졌다. 그만큼 IMF 외환위기는 국민 일반에게 '제대로 파헤쳐진 적 없는' '어려운', 그러나 '극복해 낸' 국난이었다.

 영화 < 1997 > 스틸컷

영화 < 1997 >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온 나라가 발가벗고 수영하던 시절

영화는 그와 같은 편견을 부수는 것으로 본격 돛을 올린다.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자본주의가 노정하는 근본적 결함일 수도 있겠다. 호황엔 빚을 내 덩치를 키우는 기업운용 방식이 효과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실패를 겪은 적 없는 플레이어들은 더 큰 이익만 바라보며 빚을 내고 투자하며 사업을 벌인다. 그러다 불황이 닥쳐오면 거품이 꺼지고 부실이 드러난다. 수영장 물이 빠진 뒤엔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했다던가. 알고 보니 나라 전체가 나신이었다는 민망한 이야기다.

아시아 전체를 휩쓴 경제위기 가운데 한국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1997년 벽두 자산 순위 14위 한보그룹이 부도를 맞았다. 총부채 5조7000억 원, 부채비율 1800%.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기겠지만 그 시절은 그래도 되는 때였다. 아니, 모두가 그러고 있었다. 한보는 시작일 뿐이었다. 삼미, 진로, 대농, 해태, 기아까지, 한국 경제의 기둥이며 대들보라 여겨진 굴지의 기업들이 하나하나 나가떨어졌다. 특히 기아가 남긴 9조7000억 원의 부채의 처리가 늦어지고, 마침내 정부가 이를 떠맡기로 결정한 건 악수가 됐다.

해외 투자자는 시장의 실패를 정부가 떠안는 부도덕한 판단, 즉 이 나라의 후진성에 주목했다. 그로부터 시장의 건전성과 정부의 능력을 의심하는 시각이 대두됐다. 가뜩이나 아시아 전역에서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중국이 위안화 가격을 유지하며 버텨준 덕에 최악의 사태는 피했으나 그것뿐이었다. 한국 투자자들 사이에선 '당장 한국을 탈출하라'는 메시지가 공공연히 공유됐다. 이들에게 한국은 위험이 상존하는 불안정한 후진국일 뿐이었다. 환율 급락 후 외환거래가 정지되기까지는 긴 시일이 필요하지 않았다.

국가파산을 막기 위한 정부의 선택은 해외 큰 손을 찾는 것 뿐이었다. 영화는 IMF에 앞서 우방국인 일본 등의 자금을 들여오는 것, 국가 차원의 채무불이행을 뜻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것도 대안으로 논의됐다고 말한다. 특히 AMF(아시아통화기금)을 통한 긴급융자를 제공하는 데 일본이 적극적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높았다는 건 유의할 만하다. IMF가 요구하는 가혹한 구조조정을 우회하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 방안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등의 반대로 이 안은 좌절되고 말았다고 전한다.

 영화 < 1997 > 스틸컷

영화 < 1997 >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IMF 외환위기, 공동체가 무너지던 시작점

< 1997 >은 시기를 놓치고 벼랑 끝에 몰린 한국이 IMF의 손을 붙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또 IMF가 협상 동안 지나치게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당시 협상과 경제상황, 정부 정책 등을 깊이 있게 연구한 연구자들의 입을 빌려 이 결정이 한국사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확인한다. 이를테면 노동자의 해고를 용이하게 하는 법안의 통과, 그로부터 본격화된 기업, 나아가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 말이다.

태준식은 이로부터 한국사회의 특정 집단이 위기극복을 위한 제물로 쓰였다고 확언한다. 중산층을 구성했던 노동자들이 그 탄탄했던 지위를 잃고 몰락하고 국가와 기업, 또 재벌이 그를 딛고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지난 사반세기를 거칠게 살피자면 가히 틀린 말도 아니겠다.

< 1997 >은 갈 길 바쁜 영화다.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를 거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IMF 외환위기의 희생양으로 붙들린 노동자 계급의 억울함을 비추고 ▲국익을 위한 최적의 선택을 내리지 못한 정치가, 특히 김대중 정부의 잘못을 부각하며 ▲오늘날까지도 IMF 외환위기가 남긴 영향을 제대로 정리해 평가하려 들지 않는 국가를 비판한다. 한편으로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정보공개센터의 노력을 상찬하고 ▲IMF를 앞세워 동아시아에 제 영향력을 확장하려던 미국의 본색을 까발린다. 이 과정에서 결코 쉽지 않은 ▲IMF 외환위기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설명하고 ▲한국이 이에 대처했던 우스꽝스러운 상황, 이를테면 금 모으기 운동 같은 모습을 재평가한다. ▲마땅히 제 역할을 해야 했던 고위 국가공무원들이 협상에 나서며 국익보다 제 영향력을 키우려 했단 의혹을 제기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가며 수많은 소재를 놓지 않으려 한 결과가 무엇인가. 영화는 어느 하나의 주제를 힘 있게 밀고 가지 못한다. 그로부터 메시지는 흐릿하게 변질된다. 영화에 충실히 집중하지 못한 관객은 영화 제작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정보공개센터가 확보한 문건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다.

그나마 그를 주목한 이도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영화가 다룬 다른 많은 소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안을 소개하는 데도 정신없는 가운데, 정치인을 비판하는가 했다가 정부를, 다시 협상 참가자를, 또 미국과 IMF를, 그렇게 거듭하여 과녁을 바꾸어간다. 그중 어느 하나를 진득하게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그만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거나 너무 다양한 자료를 버리지 못했던 탓이 아닐까 싶어 이해는 가는 마음이다.

또 하나 아쉬운 건 영화가 선택한 구성이다. 영화는 두 명의 진행자를 두고 영화를 풀어가려 한다. IMF 외환위기를 인터뷰나 자료화면, 또 내레이션으로만 설명하기엔 자칫 너무 어렵고 지루해질까 우려했기 때문일 테다. 그로부터 선정된 이는 임재성 변호사와 가수 이랑이다. 임재성은 스튜디오 진행자로서 중심을 잡고, 이랑은 이론적 설명이 필요한 상황마다 투입돼 이해를 돕는다.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태준식 감독은 이랑의 역할에 대하여 일종의 '고스트 프로젝터'를 의도했다며, 귀신처럼 등장하고 개입해 설명을 돕고자 했다고 부연했다. 임재성 변호사 홀로 모든 설명을 풀어가기엔 역할이 과중하게 느껴졌단 뜻이겠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좋은 소재에도 풀어가는 방식은 아쉬워

그러나 두 진행자 모두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임재성 변호사나 가수 이랑 모두 진행자 역에 발탁할 만한 이유가 선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진행이나 관련 문제 설명에 특별한 역량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어서 다큐가 스튜디오로 전환될 때마다 흐름을 놓치고 속도감을 잃으며 깊이가 얕아지는 인상이 역력하다.

심지어 가수 이랑의 역할은 어째서 따로 나눠놓은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랑이 나올 때마다 깔리는 그녀의 노래는 다큐 전체의 분위기와 따로 놀뿐더러, 다른 이의 인터뷰가 나오는 와중에도 가사가 있는 음악이 겹쳐서 나오는 게 오디오를 혼란케 할 정도다. 영화를 함께 본 이들 중에서도 비슷한 불만을 내어놓는 이가 있는 것을 보면 이 부분엔 더 많은 고려가 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밖에도 이랑이 과거 시상식에서 보인 일화 등 IMF 외환위기와 직접 엮이지 않는 이야기를 굳이 길게 삽입해 가뜩이나 초점이 흐린 이야기를 더욱 난잡하게 한 점은 치명적 아쉬움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 1997 >은 가치 있는 영화다. 관객과의 대화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된 것처럼 IMF 외환위기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그에 따른 인식도 부족한 이들이 우리 곁에 수두룩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영향은 지대해서 한국사회 전체를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로 만들어놓았다. 세계화와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개방되고 변혁된 경제체제는 기존 노동자의 힘과 권리를 상당 부분 박탈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새롭고 차별화되는 시각을 보여주진 못한대도 문제의 원인부터 효과까지를 개괄적으로 다루는 이 영화의 작업엔 나름의 의미가 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사회가 그를 제대로 해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 1997 >을 보고 난 뒤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졌다 할 수 있는 시민이 있다면, 이 영화의 가치 또한 그로부터 찾을 수 있을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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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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