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니체
아서가 점점 더 혼돈과 광기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를 연상시킨다. 디오니소스는 광기와 황홀경,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상징하는 신이다. 아서가 자신의 광기를 '문제'가 아니라 특성으로 수용하면서 조커로 변모하는 결정적 계기를 맞는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죽이기 직전에 일어난 장면이다.
사회 규범을 무너뜨리고, 폭력과 혼돈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은 확실히 디오니소스적이다. 아폴론적 질서를 디오니소스적 파괴로 대체하는 영화의 전개에서 니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열광(der Dionysische Rausch)'이다.
'디오니소스적 열광'은 니체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와 만난다. 니체가 인간 존재의 본질적 동력으로 설명한 '힘에의 의지'에서 Macht는 권력으로도 번역하지만 이 영화를 설명할 때는 힘이 훨씬 더 정확하다. 이 두 개념은 인간이 고통, 혼돈, 그리고 비극적인 현실을 넘어서는 지평에서 조우한다. '디오니소스적 열광'은 이러한 삶의 혼돈과 고통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힘에의 의지'는 이러한 수용을 통해 자신을 초월하려는 동력이다. 니체의 두 개념은 자유와 창조성의 추구로 연결되는데, 마치 이 영화를 두고 한 얘기처럼 들린다.
'힘에의 의지'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적 열광'에 사로잡히고 '힘에의 의지'로 무장한 아서는 '운명애'를 절감하며 마침내 초인(Übermensch)이 된다. 조커가 초인이다. 초인은 기존 사회적 규범과 도덕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재창조한다.
꼭 니체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전반에 니힐리즘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종반부 머레이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듯 도덕적 상대성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이 니힐리즘은 전면적 거부가 아니라 창조적 거부이다. 기존 도덕과 질서를 벗어난 새로운 도덕과 질서의 필요성을 조커의 파괴적 행동으로 상징화한다. 운명애의 권위를 내세우는 초인은 절대 허무로 잦아들 수는 없다.
조커라는 캐릭터는 단순한 할리우드식 빌런이 아니다. 계급갈등의 틀에서도 벗어나 신화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한다. 사회비평 요소가 섞인 채 니체의 철학이 조커의 캐릭터와 내러티브에 관통한다. 영화 <조커>를 해석하는 데 가장 적합한 사유를 하나 들라면 단연 니체일 것이다.
금지
아서가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로 그려지고 그렇게 영화가 시작하지만, 종국에 각성을 통해 전복의 아이콘이 된다는 점에서 계급 갈등이나 자본주의의 빈부격차 문제를 거론하기 용이한 영화가 <조커>이다. 그렇게 보지 못할 것이 없지만 그렇게만 보면 코끼리 다리 하나만 만진 격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군중의 분노는 '디오니소스적 열광'을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1968년 프랑스의 5월 혁명(68혁명)을 연상시킨다. 두 사건 모두 체제에 대한 저항과 억압에 대한 폭발적 반응을 표현한 점에서 닮았다. 계급의식으로 무장했다기보다 기존 질서를 철저히 거부하는 대중의 비조직적이고 폭발적 저항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계급의식이 저변에 폭넓게 깔리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를 뾰족하게 찌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