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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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비록 '극성엄마'인 명성왕후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러야했지만, 한편으로는 명성왕후의 성격과 정치감각을 그대로 빼닮기도 했다. 온화한 성격에 평화적으로 정쟁을 해결하려 했던 아버지 현종과는 달리, 숙종의 변덕스럽고 다혈질적이며 때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과 정치스타일은 확실히 명성왕후에 더 가깝다. 숙종으로서는 어머니가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벌어지면서 숙종이 남인세력을 축출하고 삼복 형제 역시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처형된다. 결국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돌고돌아 명성왕후가 원하는 결말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명성왕후는 서인 산당의 거두였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정계 복귀를 권유한다. 대비의 신분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당시 정계의 최대 거물이었던 송시열을 포섭했다는 것은, 명성왕후가 조선 조정의 실세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송시열 역시 이를 수락하며 명성왕후를 여중요순(女中堯舜)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요순황제는 중국에서 성군의 대명사로 칭송받는 인물들이고, 명성왕후가 여성임에도 이들에 비견할 만한 걸물이라고 극찬한 것이다. 예송논쟁 이후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명성왕후의 가문과 서인 산당이 다시 정치적 연대를 회복한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처럼 천하를 쥐락펴락하던 여걸 명성왕후도,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장희빈(張禧嬪, 본명 장옥정)의 존재였다. 그녀는 삼복형제의 심복이었던 장현이라는 인물의 5촌 조카로 궁궐에 들어와 궁녀로 일하고 있었고, 정치적 계파로는 명성왕후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인 계열에 가까웠다. 젊은 숙종은 이러한 장희빈을 총애했고 깊은 사랑에 빠졌다.
여자가 여자를 알아본다는 이야기처럼, 명성왕후는 일찍이 장희빈의 위험성을 가장 먼저 간파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장희빈을 가리켜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다.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라며 우려했다고 한다.
명성왕후가 장희빈을 경계했던 또다른 이유는, 당시 숙종이 정비였던 인현왕후 사이에서 아직 후사가 없었고, 만일 장희빈이 아들이라도 먼저 낳게 되면 이를 발판하여 남인이 다시 득세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명성왕후는 당시 궁녀였던 장희빈을 출궁시켜 민가로 내쫓았다. 인현왕후가 왕의 승은을 입은 장희빈을 불러들이고자 설득했을 때도, 명성왕후는 장희빈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끝까지 반대했다.
1683년 10월,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명성왕후는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한겨울에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며 간절히 쾌유를 기도한다. 다행히 숙종은 얼마 후 건강을 되찾았지만, 이번엔 명성왕후가 병석에 눕게된다. 1684년 1월 11일, 평생 아들만 바라보며 살았던 명성왕후는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국조보감>에 따르면, 숙종은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누구인들 어머니가 없겠으며 어느 어머니인들 모정이 없겠습니까만은, 지극한 모자의 정과 사랑이 그 누가 우리만한 이가 있겠습니까"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명성왕후의 불안한 예감은 사후에 현실이 되고 만다. 숙종은 명성왕후의 삼년상을 마치자마자, 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했던 장희빈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조선왕실의 역사는, 명성왕후의 예언처럼 환국과 스캔들이 속출하는 피바람의 시간들이 이어지게 된다.
명성왕후는 평생 아들 숙종의 왕권과 삶이 자신보다도 중요했던 인물이었다. 누구보다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했지만 그 안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꼭 이루고야마는 집착과 독선적인 성격마저도 그대로 물려준 탓에, 아들 숙종과 그 후손들의 성향 및 정치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 또한 명성왕후가 남긴 짙은 그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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