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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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더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 가족이 단순히 무관심한 게 아니라, 무관심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회스가 유대인 여성을 성노예로 쓰고, 헤트비히가 하녀를 수용소 안으로 보내서 죽일 수도 있다며 기분풀이용으로 협박하는 모습이 그 방증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일상을 누리고 지키려고 한다. 아렌트의 말마따나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사유로 일관한다. 회스가 전근 나갈 예정이라고 아내에게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헤트비히는 지금 집에서의 유복한 삶을 지속하지 못할까 봐 격렬히 화낸다. 이에 회스는 가족들을 관사 남겨두고 혼자 숙소로 떠난다. 그 집 옆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번에도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다른 인물과 대조하면 회스 가족의 문제점은 더 명확해진다. 바로 헤트비히의 친정 엄마 '리나'다. 딸을 만나기 위해 여행 온 그녀. 헤트비히는 하녀들을 동원해 가장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수영장과 정원에 핀 꽃을 자랑한다. 하지만 정작 리나의 시선은 다른 곳에 향한다. 그녀는 딸에게 묻는다. 정원을 막은 벽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헤트비히는 그 질문을 무시한 채 자기 자랑을 이어가기 바쁘다.
이 차이는 모녀의 결별로 이어진다. 아빠랑 카누를 탄 아이들이 수용소 발(發) 재 가루를 뒤집어쓰자 헤트비히는 그들을 씻기기 바쁘다. 리나는 다르다. 밤새 굴뚝을 빛내는 불길과 떨어지는 재 가루를 목격한 그녀는 전날 오후 광경을 떠올린다. 해 지는 수영장을 청소하는 유대인 하녀들과 그 뒤에서 연기를 뿜는 굴뚝을. 아침이 되자 리나는 곧장 헤트비히의 집을 떠난다. 딸과 달리 그녀는 최소한 인간적으로 사유할 줄 아니까.
뺄셈의 미학으로 완성한 영화적 논박
더 나아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혹시 모를 변명까지도 철저히 논박해 버린다. 아이히만 같은 범죄자들은 다음 같이 변명하기도 한다. 그저 명령을 따른 직장인이었을 뿐이라고. 자기들도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 지극히 영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이 결코 나치의 전쟁 범죄로부터 윤리적으로 무관하거나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최종 해결책'을 입안한 회스는 작전에 자기 이름이 붙었다면서 기뻐한다. 그는 조직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뿐, 자기 작전의 파급력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다. 물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내심 깨닫는다. 축하 파티가 끝난 뒤 사무실에서 퇴근할 때 극심한 구역질에 시달리기 때문. 이때 영화는 박물관이 된 현재 시점의 아우슈비츠와 잔뜩 쌓여 있는 유대인 희생자들의 의복과 신발을 비춘다.
이 몽타주는 회스가 내심 자기 작전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폭압적인지 마음 한편에서는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분명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는 전혀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계단을 다시 내려가며 마지막까지 철저히 무관심하기를 선택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를 이어 붙인 편집은 뺄셈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는 유대인의 피, 땀, 눈물을 직접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쉬운 길을 가지 않고도 홀로코스트의 '평범했던' 뒷사정을 보여준다. 그 어떤 작품보다도 나치의 책임을 명확히 못 박는 데도 성공했다. 전쟁 영화 중에 <덩케르크>가 있다면, 홀로코스트 영화 중에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있는 셈이다.
우리의 일상은 다를까?
마지막으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화살은 나치 부역자들이 아닌 관객에게 향한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등장할 때, 영화는 직원들도 함께 보여준다. 그들은 매일 청소하고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홀로코스트와 가장 맞닿은 곳에서 일하지만, 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그저 일상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니까.
흥미롭게도 그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영화를 본 뒤 우리가 돌아갈 일상도 마찬가지로 비극에 무감각하기 때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 등에서 자행된 비인간적 행위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한국군 내에서 사고가 터져도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라며 무관심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보면 비명을 무시하는 회스 가족과, 아우슈비츠를 청소하는 직원과, 비극을 접하고도 반응하지 않는 우리는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극 중 사과를 놓는 소녀가 유독 인상적이다. 사실 그녀는 뜬금없는 인물이다. 다른 주인공과의 접점도 없고,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등장마다 열화상 카메라로 보여주는 연출도 독특하다. 하지만 그녀는 뜬금없기에 중요하다. 그녀는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과도 아무 접점이 없다. 그 덕분에 그들이 집어갈 수 있도록 수용소 주변 곳곳에 사과를 두는 선의는 오히려 더 빛난다. 회스 가족의 무관심과 대척점에 서서.
이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진정으로 당부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일에, 내 관심사와 이익과 직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비인간적인 일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한 반성과 성찰이 없다면 누구든 회스 가족이 될 수 있다고 거듭 일깨워주면서. 그 결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분명 걸작이지만, 그 미학과 완성도에 그저 마음 편히 박수 보낼 수 있는 영화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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