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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척추 꺾은 불량배 출신 이의민... 방심이 낳은 허망한 말로

[TV 리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24.05.09 16:24최종업데이트24.05.0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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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tvN STORY
 
'한국의 맥베스' 이의민(李義旼)은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의 4대 집권자로, 천민 출신에서 시작해 한 나라를 호령하는 최고 권신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역대급 출세보다도 이의민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 모시던 주군이자 은인을 배신하고 심지어 척추를 꺾어 잔혹하게 살해하기까지 한 역대급 하극상(下剋上)을 일으킨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별 볼 일 없는 변방의 건달이 권력의 중심에까지 올라서고, 다시 비참한 최후를 맞으며 몰락하기까지, 이의민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 자체로 혼란했던 무신정권 시대의 상징으로 남았다. 5월 8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07회에서는 '무신정변이 낳은 역대급 하극상, 건달 이의민은 어떻게 왕의 척추를 꺾었나'편을 통하여 이의민의 일대기와 무신정변이 고려에 미친 영향을 조명했다.
 
불량배 이의민이 왕 옆으로 오기까지...

이의민은 12세기 중엽, 경주에서 소금장수 아버지와 천민인 어머니 사이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삼형제는 모두 체구가 컸는데 그중에서도 이의민은 키가 8척(190cm)에 이르는 엄청난 장신에 완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현대 남성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거구인데. 고려시대의 평균적인 신체조건이나 영양상태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2미터가 넘는 거한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년 시절 이의민 삼형제는 경주 일대에서 불량배 짓을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경상도 안렴사인 김자양에게 체포된다. 모진 고문 끝에 두 형은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의민은 혼자 살아남았다. 김자양은 이의민의 강인한 체력과 근성에서 군인의 자질을 발견하고 목숨을 살려주어 수도 개경의 중앙군인 경군으로 발탁시킨다.
 
이의민은 개경에 오자마자 의미심장한 예지몽을 꾸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그날 꿈에 어떤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 대궐까지 쭉 이어져있었으므로 그것을 타고 올라다가 잠에서 깨었다'고 한다. 훗날 이의민의 행적을 암시하는 묘한 복선처럼 보인다.
 
이의민은 개경에 입성한 후, 의종(毅宗, 고려 18대 국왕)의 눈에 띄어 정 7품 별장(別將)으로까지 파격 승진하게 된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흙수저 건달에 불과했던 그가, 하루아침에 국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고급 장교의 지위까지 올라 출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의민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1170년 무신정변(武臣政變)이 일어나며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문신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무신들은 고려 사회의 뿌리깊은 문신-무신 차별에 대한 불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무신정변을 주도한 핵심 인물은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 3인방이었다. 이들은 정변이 성공한 이후, 곧바로 조정과 군부의 고위직을 꿰차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 의종은 폐위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고, 동생인 왕호가 왕위에 오르니 바로 명종(明宗)이다.
 
이의민 역시 반란에 가담했다. 기록에 따르면 정변 당시 이의민이 죽인 문신들의 숫자가 다른 무신들보다도 월등했다고 한다. 이의민의 이러한 광기는 그의 잔혹한 성정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의 미약했던 군부 내 위치나 의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전력 등을 고려할 때 무신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앞장서서 설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어쨌든 출세를 위하여 자신을 믿고 키워준 의종을 배신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의민은 무신정변의 성공 이후에도 무신세력 내부에서의 위상이나 평가는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변 주역들이 단숨에 고위직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이의민도 장군으로 진급하기는 했으나 격차는 오히려 크게 벌어졌다. 이때만 해도 출신배경이 미천했던 이의민은, 이의방이나 정중부같은 무신 집권자들의 부하에 가까운 위치에 불과했다.

정치적 족쇄가 된 이의민의 '임금 살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tvN STORY
 
무신정변 후 3년이 흐른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를 추구하는 '김보당의 난'을 일으키려다가 실패로 끝났다. 의종은 다시 체포되어 유배된다. 그해 10월, 의종은 유배지에서 무신세력에 의하여 처참하게 시해당한다.
 
의종을 직접 살해한 인물은 바로 이의민이었다. 놀랍게도 이의민은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의종의 척추를 부러뜨려서 살해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의민이 의종의 척추를 꺾어버렸는데 손을 놀리자 소리가 나니 이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왕족인 왕씨는 '용의 후손'으로 불리었다. 폐위되었다고 해도 왕손을 죽인다는 것은 천인공노할 대사건이었다. 심지어 이의민과 동행했던 무장 박존위는 의종의 시신을 이불에 싸서 가마솥 두 개에 함께 묶어서 연못으로 던져넣는 시신유기까지 저질렀다. 명분없는 찬탈을 저질러서 권력을 장악한 무신정권의 잔혹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의종의 최후에는 더 씁쓸한 뒷이야기도 전한다. 이의민 일당이 떠난 이후, 한 승려가 물속으로 들어가 가마솥만 건져내고 의종의 시신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이는 바꿔말하면 그래도 일국의 국왕이었던 의종이 가마솥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을 정도로 인심을 잃었거나, 고려의 왕권이 그만큼 추락해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
 
한편으로 역사에서 의종의 죽음은 무신정변 이전 고려 전기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의종의 사망으로 더 이상 고려는 무신정변 이전의 사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무신정권은 이후 백 년 가까이 장기간 지속되어 국가의 행정과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었고, 고려는 무신정권이 종결되고 국가가 끝내 멸망할 때까지도 이전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의종 시해가 이의민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닌, 배후에 당시 집권자였던 이의방이나 정중부의 사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의민으로서는 본인의 생존과 출세를 위하여 자신이 모시던 주군을 배신가면서까지 '무신정권의 하수인' 노릇에 충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임금을 살해한 천인공노할 사건은 이후 두고두고 이의민의 발목을 잡는 정치적 족쇄가 된다.
  
이의민은 의종 사후에는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무신 최고위 관직인 상장군의 자리까지 오를 만큼 출세가도를 이어간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의민은 여전히 무신정변의 주축세력도 집권무신도 아닌,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무신들 사이에서는 권력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신정변 이후 불과 1년 만에 이고는 정권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또다른 반란을 기획하다가 이의방에게 적발되어 숙청 당한다. 또한 이의방은 1174년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기습을 당하여 암살 당하고, 권력은 정중부의 독주체제로 넘어간다.
 
1179년,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이 결사대를 이끌고 궁을 습격하여 정중부 일파들을 암살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기해정변이 일어난다. 정중부가 제거되면서 이로써 무신정변을 일으킨 1세대 주역들은 이의민을 제외하고 모두 퇴장한다.
 
권력을 장악한 경대승은 기존의 무신들과 달리 유일하게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고를 추구했던 인물이었다. 경대승은 자신의 집권을 축하하기 위하여 열린 연회에서 사람들에게 "임금을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무슨 축하인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는 당연히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이의민은 경대승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두려워했다. 하지만 경대승으로서도 많은 전공을 세워 상장군의 지위까지 오르고 사병세력까지 갖춘 이의민을 섣불리 제거하려 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후 경대승이 죽었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졌을때 이를 오해한 이의민이 경대승을 비웃는 악담을 한 사실까지 탄로나며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이의민은 경대승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결국 고향인 경주로 낙향한다.
 
하지만 1183년 경대승은 복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불과 집권 4년 만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돌연 요절한다. <고려사절요>에는 경대승이 죽은 정중부가 성내고 꾸짖는 꿈을 꾼 이후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사실 경대승은 젊은 나이에 정권을 잡아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약했고,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고를 주장하면서 국왕 명종과도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었다. 경대승은 많은 무신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당하면서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마비를 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권력의 중심에 오른 이의민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tvN STORY
 
한편으로 명종으로서는 힘있는 무신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이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천금같은 기회였다. 하지만 정치적 정통성과 권력기반이 모두 취약했던 명종은 국정을 장악할 만한 역량이나 비전이 전무했다. 명종은 경주에 낙향해있던 이의민을 3년 만에 불러들여서 정치적 파트너로 삼았다.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민을 중용하여 무신들을 통제하는 것과 동시에, 지방에서 세력을 구축할 가능성이 있었던 이의민을 오히려 가까이서 감시하고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편으로 명종은 무예가 뛰어나고 명망이 높았던 무신 출신 두경승(杜景升)을 중용하여 이의민을 견제하게 했다. 두경승은 장사로 이름을 떨친 이의민과도 완력으로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자주 으르렁거리며 기싸움을 벌였다.
 
한 일화에 따르면 두 사람이 회의에서 언쟁을 벌이다가 이의민이 기선제압을 위하여 먼저 주먹으로 기둥을 때려서 서까래를 흔들릴 만큼 힘자랑을 하자, 두경승도 이에 지지 않고 벽에 주먹을 쳐서 금이 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중서(재상들의 회의장소)에 3, 4년만 있으면 세상 제일가는 권풍을 날리겠네"라는 풍자시까지 나돌며 최고 권력자들의 철없는 힘자랑을 비꼬았다고 한다.
 
이의민은 명종 치하에서 출세를 거듭했고 1191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재상)와 판병부사(무신들의 인사담당)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오르게 된다. 이의민의 권력이 점점 커지면서 명종으로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의민은 권력을 장악하고 세력이 커지자 같은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의민이 인사권을 제멋대로 휘둘러 정사가 뇌물로 이루어졌으나 그 일당들이 서로 연결되어 조정신료들이 차마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백성들의 거주지를 빼앗아 자신의 집을 크게 짓고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는 등, 탐욕과 포학함으로 악명을 떨치며 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또한 이의민은 여색을 매우 밝혀서 예쁜 여자를 취하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이의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악행 또한 아비 못지 않았다. 장남 이지영은 경상도 일대에서 벗어난 '김사미·효심의 난' 토벌대에 파견되었으나 반란군과 내통한 혐의를 받았다. 이를 두고 경주 일대에 세력을 보유했던 이의민이 배후에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또한 차남 이지영과 삼남 이지광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악행을 저질러 세간에서는 나쁜 짓들은 골라 했는데 이 둘은 쌍칼처럼 흉폭한 쌍도자(雙刀子)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이의민의 처인 최씨 역시 남편과 아들 못지않게 성품이 흉악하여 집 하인을 때리죽이고 남자 노비와 간통을 일삼기도 했다.
 
급기야 이의민은 항간에 떠돌던 도참설인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설을 신봉하여 왕이 되려는 꿈까지 품었다고 한다. '십팔자'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왕이 된다는 뜻으로, 十八子를 합치면 이의민의 성인 李(이)씨가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약 200여 년이 지난 후에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집권하게 되니 아주 틀린 에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권력에 안주했던 탓인지 정작 왕이 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의민의 몰락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들 이지영은 최충수라는 인물의 비둘기를 빼앗은 일을 두고 시비가 붙었는데, 이지영이 최충수를 감금했고 이에 원한을 품은 최충수가 형 최충헌(崔忠獻)에게 하소연하여 이의민 일가를 제거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사서에는 기록이 간략하여 전후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 이의민 일가의 전횡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1196년 4월 9일, 명종이 사찰인 보제사로 행차하던 날, 재상으로 왕을 호종해야 했던 이의민은 병을 핑계로 일행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별장으로 향했다. 오랜 집권으로 인한 자만심 때문이었는지 호위병도 제대로 거느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최충헌 형제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됐다.

최충헌 형제는 별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던 이의민을 기습하여 살해한다. 전장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의민이었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하여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만 것이었다.
 
최충헌은 이후 이의민의 세 아들마저 모두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며 무신정권의 제 5대 집권자에 등극한다. 또한 최충헌은 명종과 희종, 두 명의 임금을 연이어 폐하고 이후 60여 년간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의 시대를 연다. 무신들의 정변으로 시작된 혼돈의 시대는 결국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고려 사회는 여몽전쟁과 그뒤에 이어지는 원나라 간섭기까지 오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의민과 무신들은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출세의 꿈을 이루어냈지만, 눈앞의 탐욕에만 눈이 멀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잃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2003년 무신정권 시대를 조명한 KBS 드라마 <무인시대>의 슬로건처럼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메시지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진리로 남았다.
벌거벗은한국사 이의민 무신정권 무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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