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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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명종으로서는 힘있는 무신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이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천금같은 기회였다. 하지만 정치적 정통성과 권력기반이 모두 취약했던 명종은 국정을 장악할 만한 역량이나 비전이 전무했다. 명종은 경주에 낙향해있던 이의민을 3년 만에 불러들여서 정치적 파트너로 삼았다.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민을 중용하여 무신들을 통제하는 것과 동시에, 지방에서 세력을 구축할 가능성이 있었던 이의민을 오히려 가까이서 감시하고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편으로 명종은 무예가 뛰어나고 명망이 높았던 무신 출신 두경승(杜景升)을 중용하여 이의민을 견제하게 했다. 두경승은 장사로 이름을 떨친 이의민과도 완력으로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자주 으르렁거리며 기싸움을 벌였다.
한 일화에 따르면 두 사람이 회의에서 언쟁을 벌이다가 이의민이 기선제압을 위하여 먼저 주먹으로 기둥을 때려서 서까래를 흔들릴 만큼 힘자랑을 하자, 두경승도 이에 지지 않고 벽에 주먹을 쳐서 금이 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중서(재상들의 회의장소)에 3, 4년만 있으면 세상 제일가는 권풍을 날리겠네"라는 풍자시까지 나돌며 최고 권력자들의 철없는 힘자랑을 비꼬았다고 한다.
이의민은 명종 치하에서 출세를 거듭했고 1191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재상)와 판병부사(무신들의 인사담당)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오르게 된다. 이의민의 권력이 점점 커지면서 명종으로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의민은 권력을 장악하고 세력이 커지자 같은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의민이 인사권을 제멋대로 휘둘러 정사가 뇌물로 이루어졌으나 그 일당들이 서로 연결되어 조정신료들이 차마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백성들의 거주지를 빼앗아 자신의 집을 크게 짓고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는 등, 탐욕과 포학함으로 악명을 떨치며 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또한 이의민은 여색을 매우 밝혀서 예쁜 여자를 취하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이의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악행 또한 아비 못지 않았다. 장남 이지영은 경상도 일대에서 벗어난 '김사미·효심의 난' 토벌대에 파견되었으나 반란군과 내통한 혐의를 받았다. 이를 두고 경주 일대에 세력을 보유했던 이의민이 배후에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또한 차남 이지영과 삼남 이지광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악행을 저질러 세간에서는 나쁜 짓들은 골라 했는데 이 둘은 쌍칼처럼 흉폭한 쌍도자(雙刀子)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이의민의 처인 최씨 역시 남편과 아들 못지않게 성품이 흉악하여 집 하인을 때리죽이고 남자 노비와 간통을 일삼기도 했다.
급기야 이의민은 항간에 떠돌던 도참설인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설을 신봉하여 왕이 되려는 꿈까지 품었다고 한다. '십팔자'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왕이 된다는 뜻으로, 十八子를 합치면 이의민의 성인 李(이)씨가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약 200여 년이 지난 후에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집권하게 되니 아주 틀린 에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권력에 안주했던 탓인지 정작 왕이 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의민의 몰락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들 이지영은 최충수라는 인물의 비둘기를 빼앗은 일을 두고 시비가 붙었는데, 이지영이 최충수를 감금했고 이에 원한을 품은 최충수가 형 최충헌(崔忠獻)에게 하소연하여 이의민 일가를 제거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사서에는 기록이 간략하여 전후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 이의민 일가의 전횡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1196년 4월 9일, 명종이 사찰인 보제사로 행차하던 날, 재상으로 왕을 호종해야 했던 이의민은 병을 핑계로 일행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별장으로 향했다. 오랜 집권으로 인한 자만심 때문이었는지 호위병도 제대로 거느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최충헌 형제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됐다.
최충헌 형제는 별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던 이의민을 기습하여 살해한다. 전장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의민이었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하여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만 것이었다.
최충헌은 이후 이의민의 세 아들마저 모두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며 무신정권의 제 5대 집권자에 등극한다. 또한 최충헌은 명종과 희종, 두 명의 임금을 연이어 폐하고 이후 60여 년간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의 시대를 연다. 무신들의 정변으로 시작된 혼돈의 시대는 결국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고려 사회는 여몽전쟁과 그뒤에 이어지는 원나라 간섭기까지 오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의민과 무신들은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출세의 꿈을 이루어냈지만, 눈앞의 탐욕에만 눈이 멀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잃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2003년 무신정권 시대를 조명한 KBS 드라마 <무인시대>의 슬로건처럼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메시지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진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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